고향 일이기에 열정 쏟아 할 수 있었다
고향 일이기에 열정 쏟아 할 수 있었다
  • 이상문 기자
  • 승인 2012.09.18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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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에 근무하면서
정 이끌려 형평성 잃은 처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위성과 명분이 있으면
팔 걷고 달려들어 해결했지요
차의환 부의장.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혁신관리수석을 역임하고 2009년부터 현재까지 고향 울산으로 내려와 울산상공회의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차의환 부회장은 고향에 대한 남다른 기억이 많다.

차 부회장이 기억하는 울산, 특히 공업센터와의 인연은 크게 다섯 가지다. 학창시절부터 정부기관의 공무원 시절, 귀향 후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공업센터 지정 50년 동안 중요한 순간에 맺은 고향과의 연분을 생각하면 일부러 만들어낼 수도 없을 만큼 특별하다.

그가 공업센터와 처음 맺은 연분은 까까머리 중학교 2학년생 무렵이었다. 울주군 청량면 중리마을 출신인 차 부회장은 1962년 2월 3일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열리는 남구 매암동 500번지 일원 언덕까지 5리길을 설레는 마음으로 한달음에 내달렸다. 당시 한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송요찬 내각수반이 참석하는 행사라 꿈 많은 소년의 가슴은 들떴다.

행사장에 도착하자 시민, 근로자, 정부관계자 등 수천 명의 군중들이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차 부회장은 그 군중들 속의 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지금까지도 당시의 벅찬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아직 가시지 않은 추위는 아랑곳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웅변을 하면서 정부의 중요한 행사에 많이 나갔었는데 그때는 국가지도자들이란 보통 사람들이 근접하기 힘든 우상으로 생각할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당시 국가를 이끌어나가던 최고 통수권자들을 근접한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줬던 것 같습니다. 행사장에서 돌아와 며칠간 잠을 설칠 정도였으니까요.”

특히 도열해 있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어 답례하던 박정희 의장의 카랑카랑하고 힘찬 목소리는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듯하다고 술회했다. 그렇게 울산 공업센터는 고고의 성을 울렸고 차 부회장은 그 현장에 있었다.

두번째 인연은 경제기획원 외자관리국에 근무하면서 이뤄졌다. 1976년 외자관리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당시의 울산 공업센터와 여천석유화학단지는 막 궤도에 올라 정착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기업들은 외국의 기술과 자본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었고 외자관리국은 그것을 해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부서였다.

차 부회장은 아직도 당시의 업무를 깨알같이 적은 수첩을 간직하고 있다. 거기에는 울산을 수시로 방문하면서 기업 관계자와 면담했던 내용, 애로사항, 지원현황, 정부 건의사항 등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차 부회장은 외자관리국에 근무하면서 울산 지원업무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다. 외자관리국에 근무할 무렵 수출가가 하락되고 생산량도 줄어들어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수하게 울산을 오고가며 울산공단의 기업들을 방문했다. 한국에탄올이 2만t 규모의 공장을 만들었지만 생산품을 음료용으로는 쓰되 공업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판단을 받아 회사가 위기에 빠졌을 때 관련 부처와 경제대책회의를 열면서 해결했던 일, 울산무기화학이라는 공해공장 처리문제, 현재 동서석유화학과 일본 합자회사의 불공정 거래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 OECF 파견자와 협의했던 일 등 굵직굵직한 일들이 기억에 남아있다. 이 모든 일을 헌신적으로 처리해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고향의 일이라는 특수한 인연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외자관리국에서 물가정책국으로 자리를 옮기고도 울산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석유화학 제품 전반에 걸쳐 전반적인 검토를 하는 업무를 맡아 초기 투자 관리에서부터 생산품에 대한 물가관리까지 관여하게 돼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인연이 형성됐다.

“공직에 근무하면서 고향의 일이기 때문에 정에 이끌려 형평성을 잃은 처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위성과 명분이 있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어 해결했지요. 다만 고향의 일이기에 열정을 쏟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80년대 초 실향민이 됐다. 회야강변의 그림 같은 중리마을이 공업용수를 감당하기 위한 회야댐 건설로 수몰됐기 때문이다. 기이한 인연이지만 세 번째 맺은 고향과의 연분이다. 고향마을 수몰은 차 부회장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을 빼앗긴 사건이다. 세상 어느 곳보다 아름다웠던 고향마을을 잃은 그는 실향민이 되고 난 후 10년 동안 거의 매일 밤 고향 꿈을 꾸다시피 했다.

그의 호는 회월(回月)이다. ‘회야강의 달’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한 그가 고향을 잃은 충격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 충격은 더 큰 것에 대한 희생이라고 생각하며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서울의 친구들도 그의 고향 이야기를 하면서 자손들이 대대로 잘 살도록 하기 위한 희생을 치른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덕담을 해 주기도 했다.

네번째 인연은 36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울산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으로 부임해서 고향의 발전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일이다.

그는 경제기획원에서 15년, 국무총리실에서 14년, 교과부에서 3년, 청와대에서 4년을 근무했다.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셈이다. 경제기획원 근무 당시 울산과 맺은 인연도 컸지만 노무현 정부시절 청와대 혁신관리수석을 역임하면서 KTX 울산역 유치, 혁신도시 조성, 옹기엑스포 성공 개최, 보훈병원 지정, 과학기술대학교 유치 등 최근 울산의 큰 일들을 고향사람들과 협조하면서 관여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공직생활을 마치고 쉬고 있을 무렵 최일학 상공회의소 회장으로부터 상근부회장을 맡을 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여러 사람을 추천했지만 최 회장은 모두 거절하고 그에게 이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자신도 놀랐지만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렸다. 하지만 그는 세 가지 이유로 최 회장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 국제금융중심지로의 발전을 위한 심포지엄 진행(2010.12.21).

하나는 모두가 말리는 일에 임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또 고향의 발전을 위해 그동안의 공직 경험을 쏟을 수 있다면 그것도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오랫동안 구상해 오고 있는 자신의 일생을 회상하는 ‘회야강의 달’의 집필을 앞당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고향의 현장에서 쓰는 책은 더 실감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36년 동안의 공직생활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에 진입해 또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열정 때문이었다.

고향에 돌아와 기업을 둘러보니 경제기획원 근무 시절인 1970년대 중반과 상전벽해를 이룬 모습에 놀랐다. 자동화, 기계화를 이룬 공장들은 인력은 감소했지만 복리, 후생, 환경이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울산공단의 모든 기업들은 이미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파악됐다. 자신이 공직생활을 하면서 고향을 위해 열심히 뛰었던 씨앗이 결실을 맺고 있는 모습을 보고 벅찬 감동을 받았다.

차 부회장이 고향과 맺은 마지막 인연은 울산공업센터 50년의 역사를 정리하는 ‘울산공업센터 50년사’의 편찬위원장을 맡은 것이다. 50년의 세월 동안 울산이 국가의 경제를 이끌어 왔고 21세기 들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이 모든 것들을 한 줄에 엮는 작업을 총괄하게 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인생이 울산공업센터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해 준다.

“이 기록은 훗날 중요한 자료로 남을 것입니다. 울산 사람들뿐만 아니라 울산에 관심 있는 사람들, 세계인들이 울산의 기적 같은 발전을 살피기 위해 이 자료를 틈틈이 훑어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업이 내 고향 울산과 맺은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며 꼼꼼히 자료를 챙기겠습니다.”

차의환 울산상공회의소 부회장은 공업센터 기공식 때 박정희 의장과 송요찬 내각수반, 까까머리 차 부회장이 어딘가 묻혀있을 군중이 함께 나온 50년 전의 사진과 고향 중리마을이 회야댐에 수몰되기 전 그림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경제기획원 재직시절 남긴 업무일지를 소중한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 이상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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