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신비의 성소들 시원은 선사시대
세계 신비의 성소들 시원은 선사시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9.16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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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키스스탄 바위산 ‘술라이만 토’ 주변 유적 수두룩
대구 ‘건들바위 네거리’ 둘러싸고 당집·절·교회 밀집
암각화 등 대곡천 주변도 기도·굿판 흔적 고스란히
시대·문화주체 바껴도 종교적 의례
키르기스스탄 서남부 지역의 중심 도시는 오쉬이다. 오쉬 시 한 가운데는 ‘술라이만 토’라고 하는 바위산이 우뚝 솟아있다. 오쉬 시는 이 산을 꼭짓점으로 삼아 둥글게 원을 그리며 형성·발전된 도시이다. 산 중턱에는 커다란 동굴이 하나 있으며, 그곳에는 이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그 동굴의 바로 곁에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 유적이 남아 있고, 이곳저곳의 바위 표면에는 암각화들이 새겨져 있다. 산과 도시의 중간지점이자 경계 지점인 산기슭에는 크고 작은 무덤들과 함께 이슬람교의 사원 모스크(Mosque)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다시 산기슭의 아래에는 박물관, 학교, 공공기관의 건물 등이 세워져 있으며, 그 한쪽에는 규모가 큰 중세기의 목욕탕 유적이 남아 있었다.

도심의 중심에 우뚝 솟은 ‘술라이만 토’ 산의 중간 중간에는 온갖 전설과 영험이 깃든 바위들이 탐방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동굴의 입구나 산꼭대기에는 이슬람교의 사제가 탐방객들에게 코란을 읽어주며 같이 기도를 하고 있다. 산 정상을 향하여 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중간 중간에 크고 작은 감실이나 굴 그리고 바위구멍 등이 나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서 기도를 하거나, 신체 또는 그 일부를 이용하여 온갖 치유 행위를 하는 등 기원을 하고 있었다.

이곳을 찾은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바위그늘이나 간신히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굴, 손을 집어넣을 수 있는 구멍 그리고 미끄럼틀 같은 바위 등의 대부분은 대단한 치료의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와 같은 지점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도를 하며, 몸을 굽혀 그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거나 또 미끄럼을 타면서 몸과 마음의 아픈 곳을 치유하고자 했다.

사람들의 마음과 손길이 닿은 바위에는 봉헌물들이 쌓여있었으며, 바위표면이나 구멍의 주변은 닳아서 매끈하였고 또 골이 파여져 있기도 했다.

현지 주민들은 이 술라이만 토를 그냥 아무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산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돌산은 유사 이래도 현지 주민들의 온갖 기도를 들어주었고, 또 아픈 이들을 치유하여 준 신령한 산이었으며, 그리하여 일찍부터 성산으로 추앙을 받았던 곳이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담아 산기슭에 무덤을 만들었으며, 신의 목소리를 보다 가까이에서 듣기 위하여 성소를 바로 그 산 아래에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성산 술라이만 토는 산봉우리의 성산과 중간의 경계지대 그리고 아래의 인간 세계라고 하는 삼계를 수직으로 구현해 놓았던 것이다.

이 산과 그 주변에서 발굴 조사된 고고 및 민속 그리고 종교적 시설물과 유적 등을 통해서 볼 때, 사람들은 이른 석기 시대부터 술라이만 토를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경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이어져 왔는데, 그의 좋은 예가 바로 산기슭에 만들어진 무덤과 사원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 사제와 탐방객들의 코란 읽기 및 기도였고 또 각종 주술행위였다.

오쉬 시와 현지 주민들, 사원과 무덤 그리고 학교와 같은 각종 종교 및 교육 시설, 박물관과 같은 문화적 시설물 등을 통해서 볼 때 술라이만 토는 역사와 문화적인 함의 이외에도 종교적 성소의 역할까지도 담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산과 산기슭 그리고 평지의 수직 시스템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평지는 인간의 세계였고, 산은 신의 영역이었으며, 그 경계 지점인 기슭은 반신반인의 존재, 즉 사제 또는 죽은 이가 거주하는 곳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성소는 일반적으로 시간의 경과, 문화 주체의 변화 그리고 종교개혁 등과는 무관하게 영속성을 띤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특정한 공간이 성소가 되고 나면, 그 종교적 신성성은 새로운 문화주체의 등장 및 그들이 신봉하는 새로운 종교에 의해 지속적으로 보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을 비단 술라이만 토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성소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예 가운데 하나로 대구의 ‘건들 바위’를 들 수 있다. 이 바위는 대구시 중구 대봉동에 위치해 있으며, 흔히들 ‘건들 바위 네거리’로 부르는데, 이와 같은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방으로 길이 뚫려 있는 곳이다. 건들 바위는 그 모양이 마치 삿갓을 쓴 노인과 같다고 하여 ‘삿갓바위’로도 불린다. 1771년에 대구판관 이서가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을 쌓기 이전까지, 바로 앞에는 깨끗한 물이 흘렀다고 한다. 바위 바로 뒤에는 높은 절벽이 버티고 서 있다. 이 건들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아이를 얻는다고 하여, 불임의 여인들이 무당과 함께 굿을 하며 기도를 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 바위 뒤의 절벽 꼭대기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무당의 당집이 있었고 또 그것은 나중에 무속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언제부터인지 건들 바위 바로 뒤에는 교회가 세워져 있으며, 그 바로 맞은편에는 불교 방송국이 세워졌다. 그 뒤에는 대봉성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절벽 뒷길에는 여러 채의 당집이 이어져 있으며, 그 곁에는 대구향교가 세워져 있다. 이렇듯 건들 바위를 둘러싸고 당집, 절, 교회 그리고 향교 등이 밀집되어 있다.

이와 같은 예를 우리는 울산의 대곡천에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천전리 암각화는 바로 옆에 있는 탑 거리 때문에 발견되었다. 탑 거리라 알려졌던 곳에는 지금도 탑신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그 주변에는 아직도 여전히 여러 채의 당집이 세워져 있다. 물론 이곳은 화랑도나 신라의 왕족들이 순례를 하던 곳이기도 했다. 암각화 바로 뒤에는 기독교의 기도원이 들어서 있으며, 하류로 1Km 정도의 아래에는 집청전 등 제실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계곡의 절벽에는 불상을 비롯한 각종 명문들이 각인돼 있기도 하다.

또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삼월 삼짇날이나 칠월 칠석 등에는 천전리 앞이나 반구대 앞에 무당 등 사람들이 비밀리에 굿판을 벌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흔적은 천전리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바위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술라이만 토’나 대구의 ‘건들 바위’ 네거리 그리고 천전리를 비롯한 대곡천 일원의 예를 통해서 확인한 바와 같이, 특정 지역의 성소는 그 시원이 선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시대가 바뀌고 또 그에 따른 문화 주체와 종교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소의 기능은 바뀌지 않았다. 성소의 공간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영속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례를 우리는 세계 각지의 종교적 사원이 세워진 곳에서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 날의 종교적 성소는 반드시 석기시대와 같은 이른 선사시대부터 의례가 거행되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례의 중심지, 즉 성소는 과연 어떤 공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떤 공간적 특성 때문에 한 번 의례가 이루어진 곳은 사회 상황이 바뀌고 또 종교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성소의 역할을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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