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건들바위 네거리’ 둘러싸고 당집·절·교회 밀집
암각화 등 대곡천 주변도 기도·굿판 흔적 고스란히
시대·문화주체 바껴도 종교적 의례
도심의 중심에 우뚝 솟은 ‘술라이만 토’ 산의 중간 중간에는 온갖 전설과 영험이 깃든 바위들이 탐방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동굴의 입구나 산꼭대기에는 이슬람교의 사제가 탐방객들에게 코란을 읽어주며 같이 기도를 하고 있다. 산 정상을 향하여 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중간 중간에 크고 작은 감실이나 굴 그리고 바위구멍 등이 나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서 기도를 하거나, 신체 또는 그 일부를 이용하여 온갖 치유 행위를 하는 등 기원을 하고 있었다.
이곳을 찾은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바위그늘이나 간신히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굴, 손을 집어넣을 수 있는 구멍 그리고 미끄럼틀 같은 바위 등의 대부분은 대단한 치료의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와 같은 지점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도를 하며, 몸을 굽혀 그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거나 또 미끄럼을 타면서 몸과 마음의 아픈 곳을 치유하고자 했다.
사람들의 마음과 손길이 닿은 바위에는 봉헌물들이 쌓여있었으며, 바위표면이나 구멍의 주변은 닳아서 매끈하였고 또 골이 파여져 있기도 했다.
현지 주민들은 이 술라이만 토를 그냥 아무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산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돌산은 유사 이래도 현지 주민들의 온갖 기도를 들어주었고, 또 아픈 이들을 치유하여 준 신령한 산이었으며, 그리하여 일찍부터 성산으로 추앙을 받았던 곳이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담아 산기슭에 무덤을 만들었으며, 신의 목소리를 보다 가까이에서 듣기 위하여 성소를 바로 그 산 아래에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성산 술라이만 토는 산봉우리의 성산과 중간의 경계지대 그리고 아래의 인간 세계라고 하는 삼계를 수직으로 구현해 놓았던 것이다.
이 산과 그 주변에서 발굴 조사된 고고 및 민속 그리고 종교적 시설물과 유적 등을 통해서 볼 때, 사람들은 이른 석기 시대부터 술라이만 토를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경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이어져 왔는데, 그의 좋은 예가 바로 산기슭에 만들어진 무덤과 사원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 사제와 탐방객들의 코란 읽기 및 기도였고 또 각종 주술행위였다.
오쉬 시와 현지 주민들, 사원과 무덤 그리고 학교와 같은 각종 종교 및 교육 시설, 박물관과 같은 문화적 시설물 등을 통해서 볼 때 술라이만 토는 역사와 문화적인 함의 이외에도 종교적 성소의 역할까지도 담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산과 산기슭 그리고 평지의 수직 시스템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평지는 인간의 세계였고, 산은 신의 영역이었으며, 그 경계 지점인 기슭은 반신반인의 존재, 즉 사제 또는 죽은 이가 거주하는 곳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성소는 일반적으로 시간의 경과, 문화 주체의 변화 그리고 종교개혁 등과는 무관하게 영속성을 띤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특정한 공간이 성소가 되고 나면, 그 종교적 신성성은 새로운 문화주체의 등장 및 그들이 신봉하는 새로운 종교에 의해 지속적으로 보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을 비단 술라이만 토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성소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예 가운데 하나로 대구의 ‘건들 바위’를 들 수 있다. 이 바위는 대구시 중구 대봉동에 위치해 있으며, 흔히들 ‘건들 바위 네거리’로 부르는데, 이와 같은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방으로 길이 뚫려 있는 곳이다. 건들 바위는 그 모양이 마치 삿갓을 쓴 노인과 같다고 하여 ‘삿갓바위’로도 불린다. 1771년에 대구판관 이서가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을 쌓기 이전까지, 바로 앞에는 깨끗한 물이 흘렀다고 한다. 바위 바로 뒤에는 높은 절벽이 버티고 서 있다. 이 건들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아이를 얻는다고 하여, 불임의 여인들이 무당과 함께 굿을 하며 기도를 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 바위 뒤의 절벽 꼭대기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무당의 당집이 있었고 또 그것은 나중에 무속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언제부터인지 건들 바위 바로 뒤에는 교회가 세워져 있으며, 그 바로 맞은편에는 불교 방송국이 세워졌다. 그 뒤에는 대봉성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절벽 뒷길에는 여러 채의 당집이 이어져 있으며, 그 곁에는 대구향교가 세워져 있다. 이렇듯 건들 바위를 둘러싸고 당집, 절, 교회 그리고 향교 등이 밀집되어 있다.
이와 같은 예를 우리는 울산의 대곡천에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천전리 암각화는 바로 옆에 있는 탑 거리 때문에 발견되었다. 탑 거리라 알려졌던 곳에는 지금도 탑신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그 주변에는 아직도 여전히 여러 채의 당집이 세워져 있다. 물론 이곳은 화랑도나 신라의 왕족들이 순례를 하던 곳이기도 했다. 암각화 바로 뒤에는 기독교의 기도원이 들어서 있으며, 하류로 1Km 정도의 아래에는 집청전 등 제실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계곡의 절벽에는 불상을 비롯한 각종 명문들이 각인돼 있기도 하다.
또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삼월 삼짇날이나 칠월 칠석 등에는 천전리 앞이나 반구대 앞에 무당 등 사람들이 비밀리에 굿판을 벌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흔적은 천전리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바위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술라이만 토’나 대구의 ‘건들 바위’ 네거리 그리고 천전리를 비롯한 대곡천 일원의 예를 통해서 확인한 바와 같이, 특정 지역의 성소는 그 시원이 선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시대가 바뀌고 또 그에 따른 문화 주체와 종교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소의 기능은 바뀌지 않았다. 성소의 공간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영속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례를 우리는 세계 각지의 종교적 사원이 세워진 곳에서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 날의 종교적 성소는 반드시 석기시대와 같은 이른 선사시대부터 의례가 거행되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례의 중심지, 즉 성소는 과연 어떤 공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떤 공간적 특성 때문에 한 번 의례가 이루어진 곳은 사회 상황이 바뀌고 또 종교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성소의 역할을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