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 발상지 내고향 울산 노벨상 배출 기대
공업 발상지 내고향 울산 노벨상 배출 기대
  • 이상문 기자
  • 승인 2012.09.04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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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대 5 시험서 1등으로 공무원 첫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실무 담당
정유·비료→ 섬유→ 조선→ 자동차
한국 산업화 과정 꿰뚫고 있는 산역사
차화준(77) 전 국회의원은 혁명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만들 때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들 가운데 포함된다. 당시 차 전 의원은 경제기획원의 경제계획관보(지금의 사무관)였다. 공개 경쟁시험으로 공직에 첫 발을 디뎠다. 당시 5명의 공무원을 선발하는데 470여명이 응시했고 차 전 의원은 1등으로 합격했다.

“혁명 정부는 기아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살려야겠다는 의지로 경제개발 계획을 시작했습니다. 그 전 자유당 말기에 만들어졌던 산업개발 3개년 계획을 수정 보완해서 만든 계획입니다. 나는 1차부터 4차 계획이 진행될 때인 1980년까지 경제기획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울산의 산업화 과정을 잘 알고 있지요.”

그가 초창기 공무원 시절이었던 1965년에 한일국교가 정상화됐다. 그리고 그 때부터 외국자본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또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넘어가는 시점에는 중화학 국장을 역임했다.

“울산공업센터 계획은 일제 말기 일본이 세웠던 국토개발계획이 크게 원용됐다고 봅니다. 당시의 계획은 상당히 구체적이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 계획을 바탕으로 이병철 회장이 일본에서 공부를 많이 했고 그 후 박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차 전 의원은 일제시대 여천고개에 조그마한 일본 석유공장이 있었고 삼산동에 경비행장이 있었으므로 이미 울산을 공업도시로 개발할 계획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단이 처음 건설될 당시 울산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정유공장과 비료공장이었다. 또 공장을 지원하기 위한 SOC 사업이 시급했다. 정부는 우선 울산건설본부를 만들고 안경모씨에게 본부장을 맡겼다. 국장은 경제기획원 과장을 했던 김영배씨가 맡았다. 당시 차 전 의원은 경제기획원 3차산업국 계획관보에 있었고 국가의 SOC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공업센터 계획이 있었지만 울산에 예산을 지원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중간과정을 없애기 위해 울산건설본부를 폐지하고 지위를 격상시킨 울산특별건설국을 신설했다. 그 후 거침없는 예산지원이 이뤄졌다.

“한국 산업은 정유, 비료산업 다음에 섬유산업이 발달했고 70년대는 조선공업이 태동했습니다. 그 다음이 자동차 산업이죠. 자동차산업과 함께 석유화학산업도 발달해 10여개의 공장이 울산에 무더기로 들어섰습니다. 그게 70년대 초반의 일입니다. 7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는 비철금속과 제지업, 정유공장 등이 들어섰고요.”

그는 한국 산업화 과정의 역사를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울산의 산업발전이 이뤄지는 동안 줄곧 정부의 중요한 부서에 있으면서 지원한 산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무관 시절 SOC 사업 지원에서부터 차관보로 퇴직할 때까지 외국자본 유치에 집중했다.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영국, 프랑스, 독일을 돌아다니면서 정부 대 정부, 정부 대 민간, 민간대 기업 등을 연결하면서 동분서주 했습니다. 요즘은 투자를 자원해서 오지만 당시는 우리나라 공단에 기반시설이 완벽하지 않아 일일이 공단 여건을 물어오면서 투자조건을 확인했습니다. 어려웠지요. 제한 송전을 하는 형편에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공업용수와 전기, 도로 등 인프라를 물어오면 땀을 흘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며 따온 외국자본은 울산공단에 많은 부분이 집중됐다. 특히 공단의 발달로 상하수도가 오염되자 아시아개발은행에서 돈을 빌려와 울산에 상당부분을 투자하면서 환경을 되살리는데 도움을 줬다. 울산이 고향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울산이 최우선 순위였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울산에 조선소를 짓고자 했지만 자금이 부족해 영국 버클레이 은행을 찾아가 돈을 빌려달라고 간청했을 때 그는 정부대표로 영국에 동행했다.

당시 가난한 나라의 중소기업 사장이 찾아와 큰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혀하는 영국의 은행장 앞에 500원 짜리 지폐를 꺼내 거북선 사진을 보여주며 옛날부터 한국이 조선강국이었음을 설명하고 외자유치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현대의 신화로 알려져 있다.

“정주영 회장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몇 안 되는 영웅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번뜩이는 창의성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였고 그런 열정과 배짱이 울산과 한국의 경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자동차가 세계 5위권의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는 역시 정주영 회장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정 회장의 관심과 지원이 없었다면 현재의 현대자동차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경제기획원을 퇴직하고 국회의원으로 정치권에 진입해서도 고향 울산에 대한 지원에 발벗고 나섰다. 당연히 예산확보가 주된 활동이었다.

경제기획원 관료 출신답게 예산의 흐름을 환하게 알고 있었고 자진해서 예결위에 들어가 울산의 예산확보에 집중했다.

“울산공항의 활주로를 넓혀야 하는데 정부가 머뭇거렸습니다. 그때 야당 간사였던 김봉호 의원과 협력해서 정말 열심히 정부를 설득했습니다. 그 결과 울산과 목포에 당시 80억원의 예산이 지원됐습니다. 그래서 지금같이 대형 비행기가 운항할 수 있게 된 거지요.”

90년대 초반 동천서로 개설도 차 전 의원이 예산을 확보해서 시작한 사업이다. 울산시가 국도7호선의 배후 노선이 필요한 것을 적극적으로 건의했고 그는 급하게 계획서를 만들어 정부에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경남도에서 계획서를 정부에 올리지 않아 예산확보가 어렵게 됐다. 그는 도지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어서 올려달라고 화를 냈다. 도지사는 “지금 올려서 예산이 확보되겠습니까?”라고 회의적으로 물었다. 그는 자신이 모두 책임질 테니 계획서만 올려달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예산을 확보했다. 고향을 위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울산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많다. 그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비춰 울산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울산은 지금 기업이 많이 들어서고 공단을 조성할 땅은 한정돼 있습니다. 공항도 옮겨야 합니다.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경공업은 오래 전에 사양산업이 됐고 중공업도 IT산업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고용창출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냥 울산의 장래가 밝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울산시는 더 머리 짜내고 산업을 다양화해야 합니다. 굴뚝산업이 아닌 지식산업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TF팀을 만들고 경제성장을 위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울산이 대도시로 성장하는데 산파역을 한 차화준씨는 UNIST에 대한 기대감도 드러냈다.

“내 고향 울산에 늦게나마 과학기술 특성화 국립대학이 들어선 것은 다행입니다. 그곳을 통해 울산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과학기술자가 배출되고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는 연세대 정치외교과를 졸업했고 경제기획원에 재직할 때 미국 뉴욕주립대로 유학을 가서 경제학을 전공한 울산이 낳은 수재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상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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