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는 수렵대상물 모형 갖춰 모의사냥 위한 표적 역할
이미지는 수렵대상물 모형 갖춰 모의사냥 위한 표적 역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8.26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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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통해 실제 사냥의 성공·안전 기원
고래심장 겨눈 작살·양 머리에 난 구멍
세계 도처 구석기 때부터 지금까지 성행
저주 마술로 둔갑 현대 축제놀이로 변형
바위그림 유적지에는 비밀스럽게 놓아둔 동물의 뼈 무더기나 집적지 등이 있음을 현장 조사 과정에서 살필 수 있다. 또한 바위그림 유적지 가운데 몇몇 곳에는 희생 제물로 바쳐진 동물이 아직도 완전히 썩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와 같은 제물들은 극히 최근에 바쳐진 것들이다.

이렇듯 바위그림 유적지 앞에는 동물의 유체(遺體) 및 뼈들이 유독 많이 관찰되는데, 이는 누군가가 특별한 목적에 따라 희생제물을 반복적으로 바쳤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뼈들은 바위그림 유적지 가운데서도 특히 현지 주민들이 숭배하는 특정의 이미지들과 깊이 관련이 되어 있음을 추측하게 해 준다.

이와 같은 희생제물의 흔적들을 통해서 현지 주민들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의 정도를 짚어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지인들은 그림 속의 이미지를 아무런 목적 없이 휘갈긴 한낱 무의미한 낙서나 시간을 때우기 위한 심심풀이의 소산 따위로는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림 속의 이미지 하나하나에 고유한 영들이 각각 깃들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온전한 이상, 그 속에 깃든 영들은 계속 머물러 있기 때문에 형상들이 살아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정기적·비정기적으로 의례를 거행하면서 형상으로 고착된 이미지 앞에 희생 제물을 바쳤던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바위그림 유적지에는 뼈 무더기나 희생제물의 흔적들이 지속적으로 관찰되었던 것이다.

선사 및 고대 미술 속의 동물 형상 가운데는 화살이나 창 그리고 작살 등이 꽂힌 것들이 있다. 대곡리 암각화 속에서도 몸통에 작살이 그려진 고래 한 마리를 살필 수 있다.

이와 같이 동물의 몸통에 화살이나 창 그리고 작살 등이 그려진 형상의 개체 수를 헤아리는 일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례들을 프랑코-칸타브리아 지방은 물론이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중앙유라시아, 시베리아,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오세아니아 등 세계 각 지역의 선사 미술 유적지 가운데서 얼마든지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구석기 시대부터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되풀이돼 오는 일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형상들은 특정 시기만의 문화적 소산물이 아니었음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바위그림 유적지를 조사하다 보면, 일부 동물 형상들의 주둥이, 뒷머리 그리고 심장 부위 등을 고의로 쪼거나 짓이겨서 훼손시킨 흔적들도 살필 수 있다.

예를 들면 남부시베리아의 술렉크 유적지 가운데는 순록과 산양 등 동물의 뒷머리를 고의로 쪼아서 훼손시킨 예들이 여럿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동물 형상에 대한 고의적 훼손 사례 가운데서 가장 이른 것은 프랑스의 ‘몽테스팡’ 동굴 속에 그려진 말과 곰 형상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곰의 몸통에는 무려 42개의 구멍 흔적이 남아 있는데, 연구자들은 그것을 모의사냥과 결부시키고 있다. 유사한 예들을 뼈 막대의 동물 선각이나 조각, 바위그림, 흙으로 빚은 소조 가운데서도 어렵지 않게 살펴낼 수 있다.

대곡리 암각화 속의 작살이 그려진 고래 형상의 경우도, 작살의 끝은 고래의 심장 부분을 향하고 있다. 이렇듯 선사 및 고대 미술에서 동물 형상의 뒷머리나 심장 등 신체의 특정한 부위가 훼손되어 있거나, 그 부분에 공격용 무기가 그려져 있는 형상들은 곧 그것을 살해하고자 한 의도가 그 속에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미지 살해의 동기는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이 실물과 같다는 인식이 전제된 것이다. 사실, 불과 몇 세기 전까지만 하여도 이미지와 실물을 구분하지 않았던 듯 보인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적(敵)이나 사냥감 등 실물을 죽이거나 사냥하기 위해서 먼저 그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또 그것을 고의로 훼손하였던 사례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좋은 예 가운데 하나가 ‘무고(巫蠱)의 옥(숙종 27년, 1701)’이다. 익히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사건은 조선왕조 숙종 연간에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무고’한 일이 발각되면서 생긴 것이다.

장희빈은 궁인과 무당을 시켜 인현왕후의 초상을 그리고 또 그것에 활을 쏘는 등 저주를 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아프리카 피그미 족의 영양 사냥이 있다. 그것은 1905년에 아프리카 콩고를 여행했던 프로베니우스(Leo Frobenius)의 목격담이다. 프로베니우스는 피그미족 영양 사냥꾼들이 사냥 직전에 영양 그림을 그린 뒤, 활을 들고 그림을 향해 모의 사냥을 한 다음, 그 활을 들고 실제 사냥에 나갔으며, 사냥에 성공한 후에는 그 그림을 지웠다고 당시에 그가 목격한 내용들을 기술했다.

20세기 중엽에 시베리아의 퉁구스 족 사회에서 민속 조사를 펼쳤던 러시아의 민속학자 투골루코프(V.A.Tugolukov)는 그의 저술 속에 사냥 의례와 관련한 주목할 만한 내용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침엽수림 지대의 바위나 돌에 주술을 위한 사냥감이 그려져 있었으며, 동물 형상 중에는 총탄 자국이 나 있는 것도 있었고 또 주변에는 소구경 총이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퉁구스 족 사냥꾼들이 사냥감인 큰사슴의 형상을 그린 다음 그것을 향하여 모의 사냥하는 이유는 실제 사냥에서 생길지도 모를 불운을 예방하고 또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사례들을 세계 각지의 수렵민족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다. 아프리카 멘드 족은 그들을 괴롭히는 레오파트를 사냥하기 위하여 사냥감의 모형을 만든 다음, 그것을 두고 모의 사냥을 벌였다.

북미 대륙의 만단 족 사냥꾼들도 들소 사냥을 위해 모두 들소 가장을 한 다음 실제로 들소를 죽일 때까지 들소 춤을 추면서 사냥 의례를 거행했다고 한다.

시베리아의 에벵키 족이나 오비 강변의 우그르족 사냥꾼들도 그들의 축제 기간 중 사냥 의례를 거행하였으며, 그때는 부족 구성원들 중 누군가가 사냥감으로 가장을 하고, 사냥꾼들은 그것을 향해 모의 사냥을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례들은 모두 먼저 사냥 대상물의 모형을 만들거나 그린 다음, 그것을 표적으로 삼아 모의사냥을 하였고, 이러한 의례를 통해서 실제 사냥의 성공과 안전을 기원했던 것이다. 사냥 주체에 따라 사냥감과 사냥 방법 등은 달랐지만, 모두가 먼저 사냥감을 형상화한 다음, 그것을 표적으로 삼아 활이나 창 또는 총을 쏘는 등 모의 사냥 의례를 벌이는 것은 같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냥 의례의 전통은 아직도 오지의 수렵민족 사회에 남아 있으며, 일부는 저주의 마술로 둔갑하여 생활 속에 뿌리박고 있고 또 일부는 도시화된 사회의 축제 마당 가운데서 놀이로 변형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듯 선사 및 고대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수렵민족들은 끊임없이 이미지를 형상화했으며, 또 그것을 살해하였다. 그 이유를 연구자들은 ‘생명주의의 현현(顯現)’이라는 말로 설명하거나 ‘융즉(融卽)의 법칙’ 등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동물의 이미지를 죽이는 일은 곧 그 동물의 살아 있는 혼을 죽이는 것과 같다거나 혹은 그 동물의 형태를 소유하는 일은 곧 그 실물을 소유하는 일과 같다는 것이 해석의 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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