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와 우리는 친연성 큰 일가
중앙아시아와 우리는 친연성 큰 일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8.2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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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란바타르 서점에 ‘삼국유사’ 번역본 눈길
알타이 산속에는 괘릉 무인상 닮은 석상
흉노 북적 서융은 동이인 우리와 같은 혈통
정체성 밝혀 몽골 등과 관계 재정립 할 필요
▲ 몽골 알타이 벌판을 지나다가 본서기 7세기 전후 흉노족의 적석총 앞에 세워진 화강암 석상. 왼쪽 허리춤 뒤의 작은 주머니를 찬 모습 등이 경주 괘릉의 석상과 매우 닮았다.
몽골인들은 한국을 코리아라 부르기 보다 ‘솔롱거스’라고 표기하고 부른다. ‘솔롱거’는 몽골말로 무지개라고 한다. 한국이 해뜨는 아침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는 설이 있다. 또 원나라에 보낸 공녀가 입은 색동저고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울란바타르에서 제일 큰 서점에 갔더니 ‘삼국유사’를 번역한 책이 보였다. 그 옆에 한국에 관한 논문을 실은 책에 솔롱거스에 대한 논고가 있었다.

출템수랭이란 학자가 한글로 쓴 논문을 보니 13~ 16세기에 고려를 솔롱가 또는 코리 등으로 불렀는데 요즘은 솔롱거스라 즐겨 표현한다고 했다.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에는 한인회가 결성돼 있고, 소식지도 발간되고 있었다. 소식지에는 이곳에 진출한 음식점, 건축상, 중고 자동차점 등의 광고가 무려 1천여 곳이 됐다.

마침 울란바타르 도심내 공원에 ‘서울 가든’이란 시설이 준공됐다는 뉴스가 몽골 영자신문에 실렸다. 서울시가 도움을 줬다고 했다.

또 경남 함안군은 자기 고장 출신으로 연세의료원을 나와 몽골의 매독환자를 치료하는데 헌신한 의사의 기념관을 세운다고 했다.

이 나라는 솔롱거스라 부르는 우리나라를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알타이 산맥 깊숙한 곳에서 경주 괘릉의 무인석상과 빼닮은 석상을 봤다. 흉노족의 무덤이라고 했다. 원성왕릉이라 여겨지는 괘릉의 무인석상은 꼬불한 머리카락과 콧수염 그리고 허리 뒤춤에 찬 작은 주머니, 그리고 손의 모습이 특징적이다.

아주 깊은 골짜기 초원에서 낯익은 석상을 만나니 반갑기까지 했다. 향을 넣는 주머니로 쓰였다는 허리 뒤춤이 꼭 같았다. 신라와 흉노는 일찌감치 서로 교류를 한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흉노(匈奴), 흉악한 오랑캐쯤으로 번역되는 이 명칭은 중국이 그들을 폄하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중국은 우리를 동쪽 오랑캐, 즉 동이(東夷)라고도 불렀으니 중국 내륙의 키 작고 똥똥한 몸집의 한족 아니면 다 서융(西戎)이거나 북적(北狄) 아니면 동이요 흉노였다.

그렇다면 중국 내륙중심 밖의 네곳의 오랑캐는 누구란 말인가?

몽골의 역사책에서 그림 한 점을 보고 단박에 정체를 깨닫게 됐다. 모두 몽골리안이었다. 몽골에서 퍼진 종족이 중국을 에워싸고 바이칼, 만주, 한반도로 전개된 것이었다. 한때 사막 북쪽의 대륙을 호령했던 흉노·선비·유연·투르크(돌궐)는 죄다 몽골리안인 것이다.

말을 타고 수렵하며 유목하던 이 종족이 농사짓고 흙을 빚던 중국 중앙지역을 둘러쌌던 것이다. 우리는 북방수렵기마민족의 후예인 것이다. 이 종족은 우랄알타이어족이란 동일 언어권에 속하며 태어날 때 엉덩이에 푸른 점이 있는 몽골반점을 공유한다.

경주박물관에는 신라 통일 대업을 이룩한 문무왕(김법민)에 대한 비문이 있다. 비문에는 김법민의 가계를 기록하면서 자신이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밝혔다. 신라의 왕통은 결국 흉노였다고 볼 수 있다.

알타이 산맥을 답사하면서 흉노의 뛰어난 역사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마차를 만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본 3개의 암각화 집적지에서 모두 흉노의 마차가 있었다. 당시 마차는 첨단 수송산업이었고 군사무기였다.

암각화 학자 장석호 박사는 흉노가 사용한 말의 재갈에 주목했다. 재갈은 지금으로 치면 광통신과 같다고 했다. 말에 재갈을 물려 사방팔방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집단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흉노는 사실 한나라 고조 유방을 굴복시킨 적이 있다. 흉노의 통치자 묵특은 한 나라 군대를 평성이란 곳에 포위하고 고조로부터 치욕적인 조약을 받아낸다. 역사는 이를 두고 ‘평성의 치(恥)’라고 한다. 한나라 후궁으로서 화친을 위해 흉노에게 시집간 왕소군(王昭君) 스토리도 이때쯤 생겨났다.

말을 잘 다루고 육포 몇 점이면 식량을 해결하는 이 종족은 12세기 징기스칸이란 인물의 등장과 함께 세계를 흔들어 버렸다.

그의 손자 쿠빌라이와 고려는 참으로 불편한 관계를 가졌다. 가까운 일가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상황까지 갔겠는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당시는 과학적 언어분석이나 인류문화학이 없었기에 동질성을 파악하지 못한채 서로 치고받았을 것이다.

이제는 이런 저런 사정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스탄’이 붙는 여러 중앙아시아 국가를 비롯 몽골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자명하다.

또 그들 나라 사람으로 구성된 다문화가정을 어떻게 봐야하는지도 자명해 진다. 중앙아시아와 우리는 매우 친연성이 큰 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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