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을 상납한 죽도 주민의 애환
화살을 상납한 죽도 주민의 애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8.12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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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해양경찰서가 들어옴으로써 육지화된 죽도(竹島)는 울산항 남쪽 입구에 자리 잡고 있었던 조그만 섬이었다. 이름이 말해주듯 예로부터 대나무가 많아 화살을 만들어 관아에 상납했다. 장생포항과 양죽마을의 어귀에 자리 잡은 죽도를 거리가 가까운 양죽마을에서 관리를 맡게 되었다.

섬을 관리하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화살공납이었다. 잘 다듬은 대나무를 나루터까지 옮기는 일도 힘들거니와 수량이 적거나 품질이 떨어지면 관아에 불려가 곤욕을 치루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마을에 큰 부담을 주는 섬이 장승개(長承浦)와 중간에 있으니 양죽 주민들은 가만히 지켜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죽도를 장승개 쪽으로 떠넘기기 위해 주민들은 고심을 거듭했는데, 어느 날 동수(洞首)의 머리에 묘책이 떠올랐다. ‘이제야 살았다’며 무릎을 탁 치는 그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오래전부터 장승개 주민들이 별신(別神)굿을 할 때, 제당의 고을막이 신을 영감신이라 하고 죽도의 신을 할멈신이라 하여 서로 짝을 이루는 신으로 신봉하였으니, 죽도는 장승개의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했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양죽 주민들은 죽도를 장승개에 떠넘기고, 화살공납에서 오는 고통을 덜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참고하면, 장생포에서 별신(別神)굿을 큰 축제로써 즐길 때 장생포에 맨 처음으로 터를 잡고 살았던 입향조인 설씨(薛氏) 등 4위의 마을 시조신을 받들어 3년마다 한차례의 별신굿을 해왔다. 장생포에서는 이 때의 골맥이신을 ‘재보’라 하였으며, 동제당의 신은 남신이었고 죽도의 신은 여신이었다. 별신굿은 동제당의 남신을 모시고 굿을 하고는, 다시 자리를 옮겨 죽여신에게 가서 굿을 하였다. 여신을 위한 굿을 할 때는 하루 전날 술을 담구어 집에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 두었다가 굿 날 파내면 훌륭한 술이 익었다고 한다. 죽도 여신의 신체(神體)는 한 돌을 세워 그것으로 신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다. 당시 화살촉을 상납하는 과정에서의 폐해를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기도 하다.

한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743년 영조 19년 1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서평·개운진의 전선 침몰로 군수품의 유실을 보충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청원을 낸 기사가 보이는데 여기서 군수품은 화살을 가리킨다.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1654년 효종 5년 6월 10일의 기사에 의하면, 검토관 홍우원(洪宇遠)이 아뢰기를 “요사이 성상께서 군대 다스리는 일에 유의하시니 이는 진실로 당연합니다. 다만 백성이 평안한 뒤에 군대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영남의 각 고을이 화살촉을 개비(改備)하는데 그 수가 지극히 많다고 합니다. 일시에 개조하면 폐단이 백성에게 미칠 것인데, 민생이 먼저 곤궁해지면 강한 활과 날카로운 활촉이 있다 한들 앞으로 어디에 쓰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다.

효종실록 1654년 효종 5년 11월 18일의 기사이다. 시폐에 대한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기를 “설사 군기가 많이 쌓여 있더라도 위급한 사태가 일어날 경우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 다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임진전쟁 때의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고 갑자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년(인조 5년 정묘호란) 이후의 사실은 목격을 해서 아는데, 대개는 위급을 당해서 군기를 버리는 자들이 무수했을 뿐 군기가 부족해서 적을 막을 수 없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중략) 변방 진보(鎭堡)의 무기 비축은 현재의 군졸이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로만 하고, 힘써 여분을 비축해 두었다가 공연히 적을 도와주는 자료가 되지 않도록 한다면 백성들의 폐단을 없애고 실용에는 부족이 없어 모든 일이 타당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허위가 뒤섞일 것을 염려한다면 병사(兵使)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병사가 없다면 감사가 살펴서 일일이 검열하게 한다면 어찌 허위가 있겠습니까. 옛말에 이른바 ‘저의 병기는 밖에 있고, 나의 병기는 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병기는 말단이고 민심은 근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기를 성명께서는 그 근본을 먼저하고 말단은 뒤로 미루시고, 또 묘당으로 하여금 계획하고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경의 충성스런 마음은 나오거나 물러가거나 다름이 없이 이렇게 간절하니, 경탄하고 가상한 마음이 끝이 있겠는가. 내가 비록 불민하나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군수품으로 진상되는 화살촉은 엄청난 노동력과 비용이 드는 것임을 이해하면서 당시 죽도 주민들이 화살을 상납함에 따른 애환을 엿보게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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