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수있다’는 신념 하나로 세계최고 기업 일궜다
‘할수있다’는 신념 하나로 세계최고 기업 일궜다
  • 양희은 기자
  • 승인 2012.07.3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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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소 건설과 함께 26만t급 초대형 유조선 건조(1974년 1, 2호선 명명식).
▲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든 국산 1호차 포니(PONY). (1975년)
▲ 선박 건조 현장 스크루 위에서 근로자를 격려하는 정주영 회장.
현대 창업자인 아산 정주영 회장. 맨손으로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을 일군 기업가, 최초의 민간 복지재단인 아산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한 사회사업가, 수많은 학교를 세운 교육가, 올림픽 유치를 주도한 체육인, 한국을 세계에 알린 민간 외교관,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튼 통일 운동가. 그의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정 회장은 울산과 깊은 인연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울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산업도시의 이미지다. 이런 울산을 대표하는 산업 중 조선과 자동차는 모두 정주영 회장에 의해 울산에 자리를 잡고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울산에 본사를 둔 현대중공업에 들어서면 거대한 공장 외벽에 걸린 글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 이 문구 자체가 정주영 회장의 경영철학이며, 기업가 정신이다.

● 전하·미포만에 중공업 역사 둥지 틀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업이 위험이 큰 업종이기는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고, 여러 연관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종합 기계공업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현대중공업이 자리 잡고 있는 울산 동구의 전하만과 미포만 일대는 튼튼한 암반이 넓게 펼쳐져 있을 뿐 아니라 파도와 풍속 등 모든 면에서 조선소 건설에 적합했다. 그래서 울산 전하만과 미포만 일대가 조선소 부지로 결정됐고, 1971년 중반부터 부지를 매입하는 등 본격적인 부지 조성작업에 들어갔다.

현대가 수십만t 급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규모의 조선소 건설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국내외에서 한결같이 회의적인 반응이었지만, 정 회장은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얻는 것이 문제이지 차관만 해결된다면 배를 만드는 일은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정주영 회장은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신념이 있는 한 멈출 수 없었다.

● 밤낮없는 노력의 땀방울 세계 1위 결실

조선소 건설에는 6천300만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정 회장은 직접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버클레이즈 은행과 접촉, 차관 제공 결정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영국 은행이 영국수출신용보증국(ECGD)의 보증을 위해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증명을 요구하자, 황량한 울산 미포만 사진과 빌린 26만t급 유조선 도면을 들고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에서 만들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 나섰다. 결국 정 회장은 그리스의 리바노스로부터 26만t급 유조선 2척을 주문받는데 성공했고, 이때부터 조선소 건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국내 공사의 수주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매일 2천200명이 넘는 작업 인원을 투입해 조선소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다. 조선소 건설기간 내내 정 회장은 거의 울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서울에서 울산으로 올 때는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출발했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칠흑 같은 밤, 혼자 승용차로 현장을 돌다 차가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울산에 조선소를 건설하던 시기를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활기찼던 때로 기억했다.

많은 시련과 우여곡절을 극복하고 세워진 ‘현대조선’은 1978년 ‘현대중공업’으로 사명을 바꾸고 성장을 거듭했다. 1983년에는 14억 달러의 수출을 기록, 국내 기업 중 최초로 10억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을 제치고 선박 건조량 기준으로 조선업 세계 1위의 자리에 올랐다.

현대중공업은 현재까지도 세계 최대, 최고의 조선업체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을 뿐 아니라 엔진기계, 해양, 플랜트, 전지전자시스템, 건설장비, 그린에너지 등 다양한 사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지닌 세계적인 종합 중공업 업체로 발전했다.

또 1975년 울산 동구에 설립한 현대미포조선을 수리조선소로 시작해 1996년 신조로 전환, 중형선박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회사로 성장했다.

●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國旗)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는 그 나라 산업기술의 척도며 달리는 국기(國旗)’라고 생각했다.

청년 시절 자동차 수리 공장인 ‘아도서비스’를 운영하며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던 정주영 회장은 1967년 본격적으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정 회장은 1967년 10월 미국 포드와 기술 제휴를 맺고, 12월 현대자동차를 설립했다.

1968년 11월 첫 차 ‘코티나’ 출시를 시작으로 1974년 7월 1억 달러를 투입해 연간 생산능력 5만6천대 규모의 자동차 공장을 착공했고, 1976년 1월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인 ‘포니(PONY)’가 탄생했다. 포니는 탄생 전에 이미 세계 62개국에서 수입을 희망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정 회장은 현대로서나 국가의 입장으로나 자동차가 미래의 주력 사업 중 하나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동차 생산이 100% 국산화되면 그에 따라 우리나라 기계 공업이 발전한다는 생각에, 또 그것으로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정 회장은 생전 자동차에 막대한 투자와 노력을 쏟았다. 그 결과 현대자동차는 세계 5위권의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다.

● 지역 발전 위한 여러분야 인프라 구축

정주영 회장은 막대한 투자를 통해 지역 인프라를 구축, 울산의 경제 뿐 아니라 교육과 문화예술, 스포츠가 함께 하는 살기 좋은 도시를 가꾸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69년 울산공업학원을 설립하고, 1970년 울산대학교의 전신인 울산공과대학, 1973년 울산과학대학의 전신인 울산공업전문학교를 세워 울산을 대표하는 대학으로 발전시켰다. 또 1976년 3월에는 학교법인 동해학원(現 현대학원)을 설립했다.

또한 시민을 위해 1991년 미포회관, 한마음회관을 시작으로 지역에 현대예술관, 대송문화센터 등 7개의 문화예술공간을 건립했다. 현대중공업은 살기 좋은 울산을 만들고자 했던 정주영 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서부, 강동, 미포축구장과 4계절 잔디축구장 등 국내 최고의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하고 울산현대축구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현대모비스는 울산모비스농구단을 운영, 시민들이 프로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정리= 양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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