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다른 시기·양식으로 그려진 형상들 혼재
다섯 개의 다른 시기·양식으로 그려진 형상들 혼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7.01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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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면·절충 쪼기로 덧 그려진 암면
제작시기·양식 동일 형상들 그룹화
집단 조형방식·시대 변화과정 읽어
당대 문화 키워드·세계관 등 유추
형상들이 제작된 시기를 분석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더욱이 서로 다른 양식으로 그려진 형상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을 경우, 그것들의 선후 관계를 분석해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을 분석해 내기 위해서는 제작 시기가 판명된 다른 유형의 형상이나 자료, 고고학적인 연구의 성과들 그리고 형상의 양식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것을 분석하는 풍부한 경험 등이 필수적이다. 그런 까닭에 연구자들은 다른 유적지에서 발견된 형상의 제작 시기나, 그것이 확정된 고고유물 등을 주목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 때는 일부 연구자들이 형상들의 색, 즉 형상들이 햇볕에 그을린 정도의 차이로 특정 암면 속에 그려진 형상들의 상대적 선후 관계를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하나의 암면 속에 여러 시기에 걸쳐 그려진 형상들이 서로 중첩되어 있을 경우, 그것들의 중첩 관계를 분석하면, 형상 상호 간의 상대적인 선후 관계를 보다 쉽게 판독해 낼 수 있다. 층을 이루며 덧 그려져 있는 형상 하나하나를 중첩된 순서대로 분석하면, 그것이 곧 상대적인 선후 관계를 밝히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바위그림 연구자들은 우선적으로 덧 그려진 순서를 통하여 형상들의 상대적 선후 관계를 파악하며, 이를 통한 일차적 편년 분석에 소홀히 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들의 절대적인 제작 시기를 밝히기 위해서는 고고학적 유물을 포함하여 그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과의 비교 연구도 필수적이다.

앞에서 이미 중첩된 형상들을 통하여 대곡리 암각화 속 형상들의 상대적인 선후 관계를 부분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그것은 이 암각화가 면 쪼기가 선행하는 기법이며, 선 쪼기가 그 뒤를 이은 것이라는 기존의 통설과는 달리, 선 쪼기, 면 쪼기와 절충식 쪼기, 선 쪼기 등의 형상들이 차례로 덧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보다 크고 또 강하게 선 쪼기와 면 쪼기 그리고 갈기 등이 혼용된 형상이 또 한 차례 더 덧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들 사이에는 이미 그려진 형상들을 흉내 낸 그림들이 몇 개 더 확인되고 있다. 이로써 이 암각화 속에는 최소 다섯 개의 다른 시기와 양식으로 그려진 형상들이 혼재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덧그려진 형상들의 순서를 기초로 하여 이 암각화의 제작 과정을 복원할 수 있고 또 형상들을 제작 시기 별로 묶어서 그룹화 할 수 있다. 만약에 제작 과정을 복원한다면, 그것은 곧 이 암각화 제작 주체와 그들의 문화상 등을 밝힐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등을 살펴낼 수 있다. 또한 제작 시기가 같은 형상을 그룹화 함으로써 제작 집단의 조형 방식, 즉 시대 양식과 그것의 변화 과정 등을 읽어낼 수 있다. 물론 시대 양식을 통해서는 당대 문화의 키워드와 모드, 사람들의 시지각 방식, 세계관 등도 같이 짚어낼 수 있는 것이다.

덧 그려진 형상들의 층위 분석을 통하여, 이 암각화에서 제일 먼저 그려진 형상들을 파악해 보면, 여러 명의 사공들이 노를 젓고 있는 모습의 배, 고래를 끌고 가는 배 그리고 작살을 치켜든 작살자비가 있는 두 척의 배 등 모두 배와 고래잡이 장면의 그림이다. 그러니까 이 암면에는 여러 명의 노를 젓는 뱃사공이 탄 배와 작살자비가 고래를 잡는 장면 그리고 잡은 고래를 끌고 가는 장면 등이 제일 먼저 그려진 것이다. 이와 같은 형상들은 주로 암면의 왼쪽과 가운데 왼쪽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로써 이 암면에 첫 그림을 남긴 사람들은 고래잡이를 하였던 어부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배와 작살 등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물론이고 바다에 나가 직접 고래를 잡았던 사람들이었다.

그 다음에는 면 쪼기로 그려진 고래들과 절충식으로 쪼여진 호랑이 그리고 사슴 등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절충식으로 쪼여진 것은 호랑이나 사슴 등 육지동물이지만, 고래를 비롯하여 적은 수의 바다동물도 포함되어 있다. 고래 등 면 쪼기로 그려진 형상들은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몸통의 윤곽에서 움직임을 살필 수 없다. 여기에서 ‘절충식 쪼기’로 그려진 형상들이란, 신체의 특정 부위는 모두 쪼고 또 일부는 선 쪼기를 한 것이다. 육지 동물의 경우는 머리 부분을 모두 쪼았으며, 몸통의 줄무늬나 점무늬 등을 형상화하기 위하여 윤곽을 선으로 쪼아서 그렸다. 그러나 바다동물들은 아가미 부위나 꼬리와 가슴지느러미 등을 주로 면 쪼기로 표현하였다. 두 번째 그룹의 그림을 남긴 제작 집단은 육지동물과 바다동물을 모두 주목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그들의 중심적인 제재는 바다동물이었다.

세번째의 그림도 역시 선 쪼기로 그려진 것들이다. 그러나 세 번째의 선 쪼기는 첫 번째 제작 집단의 선 쪼기보다 더 강한 타격 흔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려진 형상 가운데서 주목을 끄는 것은 그물이다. 그밖에도 주목을 끄는 것은 역시 선 쪼기로 그려진 호랑이, 사슴 그리고 고래 등의 형상들이다. 제재별로 볼 때 그림의 개체 수는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비교할 때 육지 동물이 크게 증가했다. 그물을 제외하면, 이들은 몸통의 윤곽선이 앞의 두 그룹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앞의 두 그룹이 좌우 대칭을 이루거나 실물에 가까운 비례를 띠고 있는데 반해, 이 세 번째 그룹의 형상들은 몸통의 좌우가 심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곧 이들 형상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첩된 형상들의 선후 관계만 놓고 본다면, 네 번째로 그려진 것은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 고래이다. 이 형상은 선 쪼기와 면 쪼기 그리고 갈기 등의 기법을 동시에 병용하여 제작하였다. 그리고 또 이 형상은 여러 가지 기법으로 그려진 다른 형상들 위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형상은 다른 형상들 보다 더 분명하고 또 깊게 새기거나 갈았다. 이로 인하여 먼저 그려진 형상들이 모두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있다. 게다가 이 형상은 다른 형상들에 비할 때 훨씬 크고 또 또렷하게 그렸다. 바위그림이나 동굴벽화와 같이 하나의 벽면에 그려진 선사 및 고대 미술의 경우, 일반적으로 늦게 그려진 형상들이 먼저 그려진 것보다도 더 크고 또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 밖에도 암각화 속의 중간 중간에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그려진 형상들을 흉내 낸 보다 늦은 시기의 형상들도 몇몇이 확인되고 있다. 그것은 암면의 중간 및 중간 아래쪽에 그려진 호랑이 등과 주 암면 좌우의 바위 표면에 그려진 일부 동물 형상들이다.

이들 몇몇 형상들은 이 암각화 속에서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조형 매너, 즉 대곡리 암각화 제작 집단이 갖고 있었던 양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른 형상들과는 이질적인 형태감을 띠고 있다.

이렇듯, 이 암각화 속에는 뚜렷하게 보이는 다섯 차례의 덧그리기가 이루어졌다. 그 중의 네 번은 형상들이 층위를 이루면서 덧그려졌고, 그 형상들 사이사이에는 그것들을 흉내 낸 그림들도 확인되고 있다. 이 암각화는 바로 이와 같은 제작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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