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 만호진(萬戶鎭)과 밀양 작원관(鵲院關)
서생 만호진(萬戶鎭)과 밀양 작원관(鵲院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7.0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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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4일 아침 울산의 관문이며 병참기지인 서생포만호진성은 임진전쟁을 일으킨 왜군에 의해 함락 당했다. 그후 왜군이 쌓은 서생포왜성에 의해 그 존재조차 잊혀졌으며, 오늘날에는 성곽의 돌조차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 성의 돌로 왜성을 쌓았기 때문이란다.

1407년 태종실록, 태종임금 재위 7년 7월 27일의 기사에 경상도 병마절제사 강사덕(姜思德)이 각 포구의 방어 대책을 건의한 내용 중에, 서생포만호를 혁파하여 장생포 만호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도록 상서를 올리고 있음을 보아 서생포에는 이전부터 만호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가까이에는 신라시대에 쌓았다는 술마성도 있음을 보아 울산만의 중요 해안 방어기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태종 6년 2월 20일 기사엔, 검교공조참의(檢校工曹參議) 윤명(尹銘)을 일본에 보빙사(報聘使)로 보냈는데, 서생포에 이르러 배가 파선되어, 죽은 자가 5명이었다. 다시 배를 수리하여 가도록 명하였다. 서생포 앞 바다가 그 만큼 항해길이 험난했음은 일성록에도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서생포는 군(郡) 남쪽 44리 거리에 있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어 외적의 침입을 막는다’라고 했다. 1750년 간행한 해동지도 울산부에는 ‘수군만호 1인을 두었으나, 1592년 년조 25년에 왜인이 쌓은 증성(甑城)으로 옮겨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서생포는 임진전쟁이 터지면서 동시에 일본군이 쳐들어 왔으며 다대포와 한날한시에 함락되었다고 보게 된다.

당시 서생포만호진성이 점령당했던 정황을 정리해 보면, 1592년 선조실록 선조 25년 4월 14일 기사에서,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바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왜적이 군대를 나누어 서생포와 다대포를 함락시켰는데,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이 대항하여 싸우다가 전사하니 바닷가의 군현(郡縣)과 진보(鎭堡)들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흩어졌다.

일본군은 전쟁 첫날 부산포에 상륙하고, 동래부를 함락한다.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전사했으며, 적은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김해·밀양을 함락했는데, 울산 병영성에 주둔한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오직 이웃 마을 밀양 부사 박진(朴晉)과 함께한 조선군인들은 최후까지 백병전을 전개하여 싸웠으나, 왜군의 총탄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조선군은 후퇴길 조차 차단당하게 되자 박진 부사는 겨우 밀양성으로 돌아와 창고에 불을 지르고 성(城)을 비웠다고 하였다.

이때 경상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이 진주에서 적을 맞아 싸웠다. 우병사는 아장 이종인(李宗仁)을 시켜 백마를 타고 쳐 들어오는 왜군 장수를 쏘아 죽이니 드디어 적이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밀양시 삼랑진읍의 작원관전투유적지에 다녀왔다. 이곳은 밀양부사 박진(朴晉)이 300여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지휘하는 일본군 1만8천명을 대적해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장이었다. 작원관은 물금 원동을 거쳐 밀양으로 넘어가는 좁고 험한 강변로이다. 당시 고니시 군은 작원관에서 박진 밀양부사가 이끄는 조선군의 저항과 험난한 작원관을 뚫지 못하자, 양산 원동 방면으로 우회하여 육로와 산을 타고 내려와서 후방을 공격하였다. 이 때 조선군은 퇴각하면서 응천강(밀양강)에서 익사하는 등, 거의 순절했다. 밀양성 전투에서는 패배한 박진 부사는, 의병 주도로 벌어진 영천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박 부사는 일본군의 선봉에 선 장수 사야가(沙也可)를 조선인 김충선(金忠善)으로 귀순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원’조는 작원에 관련하여, 밀양부의 동쪽 41리(약 16km)에 있다. 원으로부터 남으로 5~6리(약 1.5km) 가면 천길 물길로 떨어지는 낭떠러지를 따라 돌을 깨어 암벽에 설치한 잔도가 있어 매우 위험하다. 작원관은 월악산 문경 새재에 자리한 조령관과 더불어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제일 관문이었고, 서울 남대문에서 출발하여 대구, 밀양을 넘어 부산 동래에 이르는 총 길이 3백80km 영남대로의 중요한 역원이다.

밀양시에서는 경부선 부설 때 작원관 현남문이 있었던 자리에 1939년에 작원관기지(鵲院關基址)라는 비를 세웠고, 1995년에 작원관을 복원했다. 작원관을 답사하는 동안 내내 풀숲에 가려져 찾기조차 쉽지 않은 몇 안남은 서생포만호진성의 성 돌이 떠올랐다.

전옥련

울산문화관광 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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