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본 대신 투명비닐 채록하자 기존학설 뒤집는 결과 나와
탁본 대신 투명비닐 채록하자 기존학설 뒤집는 결과 나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6.17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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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 갯수 217개보다 50개 더 확인
‘울타리’는 작살자비·뱃사공 탄 배
면·선 쪼기 제작순서도 크게 수정
지난 2000년 5월, 우여곡절 끝에 나는 울산광역시와 예술의 전당의 지원과 협조를 받으며, 대곡리 암각화를 정밀하게 채록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나는 그동안 전통적으로 고수되어 오던 탁본 조사의 방법을 피하고, 폴리에틸렌(투명비닐)을 이용하여 형상을 직접 모사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비닐로 암각화의 형상을 채록한다는 것은 그때까지 국내 학계에서는 이해도 안 되었고 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연히 비닐로 암각화 속의 형상을 채록해 본 사람도 없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금석문은 물론이고 암각화 연구를 위한 자료 획득의 방법은 전통적으로 이용하여 오던 탁본 치기가 전부였으며, 이를 통하여 그것들의 기초적이자 기본적인 자료를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것만이 유일하고 또 절대적인 방법인 것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시도하였던 대곡리 암각화 조사 방법은 지역뿐만 아니라 관련 학계에 조그마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벌어졌던 온갖 웃지 못 할 에피소드는 앞으로의 후일담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당시 나는 크게 두 가지에 주안점을 두면서 대곡리 암각화의 조사를 진행하였다. 첫 번째는 그림이 그려진 암면에 어떠한 인위적인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사를 위한 비계는 암면과 50센티미터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설치하였으며, 비계 설치를 담당하였던 인부들이 못을 박는다든가 하는 일을 엄금하였다. 조사를 마친 후에는 비계를 비롯한 일체의 조사 관련 장비는 바로 철수시켰다. 형상 채록을 위한 기본적인 장비는 폴리에틸렌과 그것을 붙이기 위한 소위 ‘마스킨 테이프’ 그리고 유성 펜이 전부였다.

두 번째는 모든 조사대원이 형상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도 갖지 않고 조사에 임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물론 조사자에 의한 형상의 왜곡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가 모든 조사 대원에게 요구하였던 것은 타격 흔적 하나하나를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옮겨 그리라는 것뿐이었다. 미리 형상을 파악하고 또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옮겨 그리진 것들 속에는 선입견이 깃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타격 흔적 하나하나를 충실하게 옮겨 그리면, 그것이 곧 암각화 속의 실제 형상에 가장 가까운 도면이 되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곁들여 나는, 처음부터 채록 도구로 색이 다른 유성 펜을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이 암각화 속의 형상들이 몇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의 타격 흔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격 흔적이 다르다는 것은 곧 그 형상을 남긴 제작자와 시기 등이 서로 달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부 형상들은 부분적으로 서로 겹쳐져 있었는데, 바로 이러한 부분들은 형상들의 선후 관계 및 제작자들 사이의 조형 매너의 차이 등을 살피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러므로 조사를 시작하면서 채록의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그에 따라서 서로 다른 색으로 대곡리 암각화의 형상들을 충실하게 모사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의 나는 탁본을 통한 암각화 연구에 강한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탁본이 그림이 그려진 암면 훼손의 주범 가운데 하나이며, 두 번째는 탁본이 하나하나 독립되어 있는 형상을 떠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지만, 대곡리 암각화처럼 얽히고설킨 형상들을 판독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탁본을 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형상의 왜곡이 심하게 이루어지기도 하는 점 때문이었다.

암석이나 암각화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바위도 마치 사람의 살갗처럼 표피가 있다는 것이다. 살갗에 상처가 나면 속살이 곪듯이, 바위도 껍질에 흠집이 생기면 곧장 풍화가 진행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탁본을 치기 위해서는 음각된 형상의 요철 부위에 종이를 밀어 넣으려고 물먹은 종이를 암면에 부착시킨 후 비록 붓 등일지라도 지속적으로 두드려 밀착을 시키게 된다. 그리고 또 먹물 먹인 솜방망이로 다시 요철 중 튀어나온 부분을 두드리면서 원하는 이미지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바위의 껍질은 심각하게 타격을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정교한 형상들의 섬세한 타격 흔적들도 마모되면서 훼손되는 것이다.



또한 탁본으로는 여러 차례 무질서하게 덧그려진 형상들이나 보다 오목한 부분 또는 틈새 등에 새겨진 형상들을 떠내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부분들, 즉 탁본이 놓치고 만 부분이나 중첩된 부분의 형상을 연구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타격의 흔적이 극히 미미한 형상과 암면 자체가 요철이 심한 경우 등도 그것을 온전히 떠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탁본으로 떠낸 형상을 도면화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시 종위 위에 옮겨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탁본 연구의 또 한 가지 문제점은, 그것을 뜨는 사람의 주관이 깊게 반영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탁본은 요철의 차이를 구분하고, 그 중에서 튀어나온 부분에 먹물을 입히는 방식을 취한다. 그에 따라서 탁본을 뜨는 사람이 먹을 먹인 솜방망이를 어떻게 두드리느냐에 따라 형상은 이렇게도 되고 또 저렇게도 되는 것이다. 강한 타격 흔적 옆에 있는 작고 미세한 타격 흔적은 경우에 따라서 무시되기도 하고 또 애매한 형상일수록 자의적인 해석에 의한 탁본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동안 암묵적인 동조 속에서 이루진 탁본의 이와 같은 폐해를 우리 학계는 그동안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일부 양식이 없는 연구자들이 탁본 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세계의 선사학계에서는 탁본의 폐해를 이미 오래 전에 인식하였으며,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의 형상 채록을 지양하고 있다.

2000년 5월, 나는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폴리에틸렌을 통한 대곡리 암각화의 조사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폴리에틸렌을 이용하여 대곡리 암각화의 형상 채록을 하였으며, 그로부터 2년 후인 2002년에는 천전리 암각화를 역시 같은 방법으로 조사하였다.



이와 같은 정밀 모사를 통한 대곡리 암각화의 조사는 그때까지 진행되어 온 학계의 연구 성과와 통설을 송두리째 뒤집는 획기적인 결론을 얻게 해 주었다.

그 첫 번째는 이 암각화 속에 그려진 형상의 개체 수의 차이였다. 대곡리 암각화 속에는 그동안 알려진 217개 보다 무려 50여 개가 증가된 270개의 형상들이 그려져 있음을 밝혔다.

두 번째는 면 쪼기에서 선 쪼기로 바뀌었다던 주장과는 달리, 이 암각화의 제작 기법은 선 쪼기에서 면 쪼기와 절충 쪼기 그리고 다시 선 쪼기 등의 순서로 제작된 점, 기존의 울타리라고 보았던 형상들은 작살자비와 뱃사공 등이 타고 있는 배였던 점 그리고 이 암각화를 최초로 남긴 제작 집단은 선단을 구성하여 고래를 잡았던 사람들이었던 점 등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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