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꼬리 절인 ‘오베기’와
羊꼬리 절인 몽골 특미 동질성
고래꼬리 절인 ‘오베기’와
羊꼬리 절인 몽골 특미 동질성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6.03 20: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얗게 썬 오베기 울산 잔칫상에 빠질수 없었던 별미
양의 하얀 비계 간난아기부터 먹으며 민족음식 익혀
풍토·지역성 똘똘 뭉친 음식 조상이 준 불멸의 미각
▲ 6개월 이상 소금에 절인 고래의 꼬리지느러미 요리 오배기.
오베기! 연세가 좀 든 분으로 토박이 울산 사람이라면, 이 말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울산 사람들의 잔칫상에 빠질 수 없는 고래 고기 요리 가운데 하나이다. 지인에 따르면, 용잠이나 염포 그리고 장생포 등 울산만 인근의 주민들은 일찍부터 그것을 즐겨 먹었으며, 특히 결혼식 잔칫상에는 빠지지 않는 요리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오베기’ 빠진 결혼식 잔칫상은 요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비단 잔칫날뿐만 아니라 무언가 특별한 날에는 반드시 맛을 봐야 하는 요리로 자리매김하였다는 것이다.

오베기! 그것은 6개월 이상 소금에 절인 고래의 꼬리지느러미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 멀지 않은 최근까지도 울산 사람들은 잔칫날 소금에 절인 고래 꼬리지느러미를 채처럼 썰어서 데친 뒤 초장에 찍어 먹었다고 한다. 지인에 따르면, 그의 어린 시절에는 집집마다 장독 가운데 하나에 고래 꼬리지느러미를 소금에 절여놓고 사시사철 즐겨 먹었으며, 특히 아이들은 그것을 껌처럼 씹고 다녔다고 하였다. 소금에 절인 까닭에 처음에는 짭조름하지만,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났다고 하였다.

그렇게 즐겨 먹었던 오베기 요리는 당연히 잔칫상에 나와야 하는데, 정작 그의 결혼식 때에는 ‘오배기’가 보이지 않아서 마음 한편으로 서운함을 느꼈다고도 하였다. 한 때 시장 어디에서나 소쿠리나 광주리에 풍성하게 담겨져 있었던 오배기와 그것을 안주 삼아서 술잔을 기울이던 어른들의 모습에서 정겨움마저 느껴졌으나, 이제는 그런 광경을 살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였다. 물론 그 이유는 1986년 이후 실시된 상업 포경의 금지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오배기는 다른 지방에서 맛볼 수 없는 울산의 토착 음식인 듯하다. 그것을 먹어보지 않은 외부 사람들에게 ‘오베기’가 뭐냐고 묻는 일이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아 그것은 그야말로 풍토성과 지역성 등으로 똘똘 뭉친 토착 음식이자 그것을 이르는 말인 것 같다. 이 말의 유래를 속 시원히 설명해 준 이는 아직 없었다. 그러니까 토박이 사람들은 그 말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었던 흔하디흔한 음식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이렇듯, 그것이 순 우리말인지 아니면 일본말과 서로 뒤섞인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이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말의 유래야 어찌 되었든 간에 울산만 인근의 사람들이 오랜 옛날부터 즐겨 먹었던 요리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수개 월 전에 특별히 고래 고기로 만든 요리를 맛보고 또 그에 관한 울산 사람들의 정서와 인식 등을 접하고는 ‘오베기’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음식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우선 이 요리에 쓰이는 고래의 주요 부위가 꼬리라는 점이며, 나아가 그 부위는 흰색인 점, 그것이 비계의 한 종류로 여겨지는 점 그리고 그것을 소금에 절여서 먹었다는 점 등이다.

어느 새 20년 전인 1993년의 일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몽골에서 바위그림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몸으로 체득하는 귀중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 중의 하나가 양고기로 만든 음식이었다. 몽골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양, 염소, 소, 말 그리고 낙타 등을 ‘다섯 가지의 가축’이라고 하고, 그것으로 식량을 삼았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식량원은 양이었다. 5인 가족을 기준으로 하여 겨울 한 철을 나는 데 필요한 식량으로 열다섯 마리의 양과 두 마리의 소 그리고 낙타와 말 중 어느 하나 등 총 17~8마리의 가축을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잡는다.

유목민들은 긴 겨울을 양고기를 주식으로 하여 간간히 소와 말 또는 낙타 고기를 먹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식탁에서 야채로 된 반찬과 밥을 찾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다. 몽골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설날 ‘차강 사르’(우리나라의 ‘구정’에 해당함)가 되었고, 몽골인 가정에 초대를 받았는데, 식탁에는 삶은 양 한 마리가 통째로 놓여 있었다. 주인은 하얀 비계가 통통한 엉덩이 부분이 있는 쪽으로 나의 자리를 마련하였고, 그리고 친절하게 양 꼬리의 하얀 비계 한 점을 썰어서 정중하게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때 손사래를 치며 극구 사양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장 귀한 손님을 상석에 앉히며, 그곳은 언제나 양의 엉덩이와 꼬리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귀한 음식으로 여기는 것은 살코기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백의 비계였던 것이다.

그 해 겨울은 이집 저집에서 삶는 양고기 냄새 때문에 심한 두통을 앓으면서 보냈고, 양고기와 친해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6개월 뒤 여름에 몽골의 중서부 바양혼골 아이막(행정단위 ‘도’에 해당) 일대에서 암각화를 조사하였으며, 뜻밖에도 그곳에서 울란바타르에서 가깝게 지내던 젊은 몽골인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 부부에게는 태어난 지 5~6개월 된 딸이 있었으며, 결혼 후 처음으로 온 식구가 처가와 친정 그리고 외가를 나들이하는 중이었다. 그 처가는 행정도시 바양혼골 시에서 서북쪽으로 얼마 멀지 않은 후렝진스라는 곳이었는데, 그들은 내가 같이 가기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그렇게 하여 나는 난생 처음으로 유목민 집 ‘게르’를 방문할 수 있었으며, 그 때 그곳에서 양을 잡고 또 그것을 해체하여 요리하는 전 과정을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모든 것들이 흥미로웠지만, 그 가운데서 특별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외할머니가 아직도 갓난아이인 손녀에게 금방 삶은 양고기의 하얀 비계를 가늘고 길게 썰어서 입에 넣어주었던 일이다. 그러자 아직 한 돌도 채 되지 않은 그 어린 손녀는 그것을 쪽쪽 빨아먹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그 행위는 경험을 통해서 획득한 유목민들의 삶의 지혜와 전통 등이 할머니를 통해서 손녀딸에게로 전달되는 순간이었으며, 손녀는 할머니가 준 비계를 빨면서 그 맛을 거부감 없이 익히게 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들이 할머니가 떠먹여준 된장국이나 청국장이 맛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를 조사하면서, 가판대와 가게 그리고 시장 등 도처에서 소금에 절인 하얗고 두꺼운 비계 ‘살로(salo)’를 목격할 수 있었으며, 그것이 다른 어떤 살코기보다 비싸면서도 인기 있는 식품임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와 같은 하얀 비계를 먹는 전통이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산양 ‘쿠르듀크(kurdyuk)’ 를 가축화하면서 비롯되었음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살로’의 조리 및 보관 방법은 소금에 절이는(鹽藏) 것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오베기’는 바로 유목민들이 즐겨 먹는 삶은 양고기 비계나 소금에 절인 비계 ‘살로’의 울산만 형식이며, 그것의 연원은 암각화를 남긴 사람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을 것임을 여타 지역과의 비교를 통해서 조심스럽게 추정할 수 있다.

울산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렇지만 즐겨 먹었던 ‘오베기’라는 음식 속에도 여느 지역과는 구별되는 이 지역 사람들의 기질과 정신 그리고 전통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