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잡이로 문명화 첫걸음 뗀 선사시대 사람들
고래잡이로 문명화 첫걸음 뗀 선사시대 사람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5.0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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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사고·노동력·과학 등 혼재
도구·배 만든 기적같은 미스터리
오늘날 우주선 개발 능가 큰 의미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낱낱이 기록
거대한 몸집의 소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배에는 상처가 나서 장기가 튀어나와 있고, 미늘이 달린 긴 창 하나가 상처 부위를 스치며 엇비스듬히 그려져 있다. 옆에는 반조인(半鳥人)이 손을 벌리고 서 있다. 그의 모습은 흥미롭게도 머리는 새처럼 부리가 달렸으며, 양 손의 손가락은 다섯이 아니라 각각 네 개씩 달려 있다. 또한 배꼽 근처에는 뾰족한 돌기가 하나 앞으로 튀어 나와 있다. 오른손 아래에는 막대기 끝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새의 꽁지와 창끝 사이에는 곤봉처럼 보이는 막대기도 하나가 그려져 있다. 반조인과 새의 왼쪽 아래에는 코뿔소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라스코 동굴 속에서도 가장 깊은 곳, 그 중에서도 소위 ‘샘’이라고 불리는 웅덩이 밑바닥에 그려진 것이다. 이렇듯, 그것이 그려진 공간과 형상들의 구성 양상 등을 놓고 볼 때, 이 그림은 비밀스럽고 또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그런 만큼 이에 관한 해석도 분분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사냥 과정에서 벌어진 사고’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을 요약하면, 들소가 사냥꾼인 반조인을 들이받아서 불행하게도 그는 쓰러졌으며, 그 들소를 왼쪽의 코뿔소가 다시 들이받아서 배에 상처가 났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는 들소와 마주 서 있는 반조인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물론 이 주장은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반박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반조인이 쓰러져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선사 시대의 화가들은 오늘날의 화가들이 풍경화를 그리듯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며, 그런 까닭에 만약에 반조인을 중심으로 하여 이 그림을 보면, 그는 쓰러진 것이 아니라 서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상처를 입은 소가 쓰러져 있는 것이 어쩌면 더 타당한 주장일 수 있다. 전체의 구도를 놓고 본다면, 제장(祭場)에서 소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 샤먼이 의례를 거행하는 장면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소의 상처 부위를 스치며 엇비스듬히 그려져 있는 창과 그것 보다 짧은 곤봉이다. 그 이유는 이 둘이 모두 특별한 목적에 의해 고안·제작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일만 수천 년도 더 전에 그려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양이 고대의 창이나 오늘날의 호신용 무기 등과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라스코의 샤먼은 거대한 들소를 제장에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 하나의 그림은 석기 시대의 인류가 걸어 온 문명화의 길 중 그 첫 머리를 살피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거듭 강조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곡리 암각화는 선사 시대 태화강과 울산만 사람들이 이룩한 문명의 단상들을 도상으로 생생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인류가 아직도 문명의 변방에서 낙원의 미몽에 취해 있던 저 까마득한 석기시대에 이미 그들은 돌을 깨뜨려 칼을 만들고 도끼를 만들었으며 톱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것으로써 다시 나무를 베고 그것을 다듬어서 배를 만들었으며 또 노를 만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물을 만들고 작살을 만들었으며, 창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만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작살을 던져 고래를 잡았던 것이다. 그들이 성취한 꿈을 하나씩 낱낱이 기록한 것이 바로 저 대곡리 암각화이다.

그들 앞에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그와 더불어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고래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고래가 지닌 무진장한 가치만큼이나 그것을 포획하는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그런 까닭에 선사 시대 태화강과 울산만 사람들은 두 가지의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그들이 희망하는 고래를 포획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먼저 바다에 나가야 했고 또 고래와 싸워서 반드시 이겨야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고래들이 서식하는 바다는 분명히 꿈과 기회의 무대이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위험이 가득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공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고래나 바다는 모두 이율배반적인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불리한 조건을 해소하지 않는 한, 그들의 꿈과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선적으로 극복하여야 할 과제는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고래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배이자 작살이었다. 선사시대 태화강과 울산만 사람들은 바로 그 점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은 마침내 그 꿈을 성취하였다. 저 대곡리 암각화 속의 배들과 작살은 그들이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마침내 창안해 낸 위대한 사유와 노력의 결정체이며, 동시에 그것은 이 지역이 이미 선사시대에 문명이 개화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그와 같은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었을까? 과연 무엇이 사람을 바다로 나가도록 유혹하였고, 누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수단으로‘배(船)’를 고안하였던 것일까? 누구의 어떤 확신으로 나무를 베었으며 또 그것을 운반하여 배를 만들 수 있었을까? 나무는 어디에서 구하였으며, 무엇으로 그것을 운반하였을까? 저 대곡리 암각화는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그것은 기적처럼 선사시대 태화강과 울산만 사람들이 이룩한 문명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미스터리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은 고래이다. 고래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생활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식량은 물론이고 에너지원과 각종 원자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자원이었던 것이다. 태화강과 울산만 사람들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향유하기 위해서는 힘을 합하여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도구를 만들고 나무를 베었으며, 그것을 다듬고 또 배를 만드는 등의 역할을 분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들에 대한 누군가의 확신과 그에 대한 구성원 전부의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곡리 암각화는 바로 그러한 일들의 총화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쉬운 방법으로 선사시대 태화강과 울산만 사람들은 나무를 베고 또 그것을 운반하여 그들이 고안한 대로 배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숱한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그들의 염원을 성취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배를 만듦으로써 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바다를 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한반도의 선사시대 사람들이 처음으로 걸었던 문명화의 길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속에는 선사시대 태화강과 울산만 사람들의 창의적 사고, 확신, 노동력, 기술, 과학, 의지 등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그들이 만든 배는 근대의 석유시추선이나 오늘날의 우주선 등을 능가하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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