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고 채우고
비우고 채우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4.1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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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텅 비어 보이던 하늘에 새들이 바쁘게 지저귀며 공중을 날아다닌다.

타협의 여지없이 꽁꽁 언 추위가 마음마저 얼어붙게 만들던 지난 겨울이었다. 이렇게 암팡진 계절에 생전 격어보지 않은 일들이 굴비 두름처럼 줄줄이 연달아 일어났다. 사람이 한 번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꼭 귀신 장난에 홀린 것만 같다.

지난 여름, 친정엄마 백내장 수술과 함께 뜻밖의 혼란은 시작되고 있었다. 엄마가 시력을 잃기 시작한 것은 제법 오래 전부터였지만, 떨어져 살다보니 그 심각성을 미처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딸(4자매)들이 놀라 병원 문을 두드렸을 때는 엄마의 시력은 일상이 힘들 만큼 나빠져 있었다.

의사의 권유로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가볍게만 생각했던 수술 후유증은 꽤나 오래 갔다. 약간의 빛도 거부하시면서 한 낮에도 깜깜하게 커튼을 치고 생활하시더니, 급기야 정신마저 조금씩 이상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옛날 어르신들의 삶이 대부분 그렇듯, 그저 참고만 살아 온 당신의 일생이 억울하셨던 것일까. 우리 딸들에게 평소 엄마모습과는 정 반대의 언행을 마구 하셨다. 환자의 병구완도 힘겨웠지만 그런 부분이 더욱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엄마 체중이 급격하게 줄기 시작했다. 원래 체구가 자그마하신 편이었지만 그래도 살집은 꽤 있는 편인 엄마의 몸무게가 급기야 38kg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덜컹이는 마음으로 허둥지둥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다.

결국 위암 초기라는 진단이 나왔고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셨지만 수술을 받게 되었다. 학교와 병원과 집을 오가는 생활이 계속됐다. 하필 그런 와중에 생전 관심에도 없던 부동산 재테크에 일순간적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모든 상황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관심이 없었던 만큼 실수투성이의 결정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초래했다

그렇게 무엇에 홀린 듯한 일들을 겪으면서 팽팽했던 신경이 마침내 긴장의 줄을 놓기 시작했다. 신경성 위궤양과 식도염, 허리디스크와 목디스크가 줄줄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정신이 결국 육신의 건강을 해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튼튼하다고 믿었던 몸마저 아프니 모든 일들이 도무지 귀찮기만 했다. 병원을 찾아다니고 입원을 하고 약을 한 움큼씩 먹으면서 버티는 시간들이 흘렀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행복한데 나 혼자만 딴 세상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의 병세도 날이 갈수록 악화 되었고 급기야 재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날씨는 또 어찌 그리도 춥기만 하던지. 낯선 병동을 향하는 길목에서 언 바람이 전신을 때릴 때면 저절로 차가운 눈물이 흐르곤 했다.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꼬여가는 일들에 연속으로 휘말리다보니 내 정신마저 나가버리는 것 같았다.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일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해결이 되어갔다.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은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지우기 시작했다. 이사를 마음먹었고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버리는 작업이었다. 마음을 비우는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우선 알뜰히 모아 두었던 글쓰기 자료부터 버렸다. 몸처럼 생각하던 책을 다 버리고 몇 십년간 아껴오던 테이프를 버렸다. 마치 이런 것들이 나를 힘들게 만든 것처럼. 일단 마음을 비우니 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버리는 만큼 다른 일들도 하나씩 정리가 되어 갔다. 엄마 병환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지금 창밖으로는 얼었던 땅이 풀리고 그 속에서 파릇한 싹이 돋아나더니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다. 올 것 같지 않던 봄이 다시 돌아 온 것이다.

나를 돌아본다. 겨우내 얼어있던 내 마음에도 노란 봄이 조금씩 자라고 있다. 기특하게도 꽉 닫혀 있던 내 마음이 들린다. 나는 다시 숨쉬기 시작하는 생명에 하염없이 물뿌리개를 들이대 본다. 꼭꼭 닫아두었던 창도 활짝 열어젖힌다.

전해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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