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인 포경술은 세계서 가장 선진화된 기술
반구대인 포경술은 세계서 가장 선진화된 기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3.18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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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곳 포경도 한자리서 비교
두척 이상의 배 협동 고래잡이
선사시대 대곡리 암각화 유일
아직까지 타 지역 발견 예 없어
선단 방식은 근대포경의 시원
스페인·러시아·일본보다 앞서
종 구분
대 곡리 암각화는 세계 포경 사상 획기적인 대 기록물이다. 이 암각화가 발견됨으로써 인류의 포경사는 그 시원이 수천 년 전의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단순한 포경사실뿐만 아니라 선단을 구성하고 바다에서 고래를 잡았음을 이 암각화는 분명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그림 속에는 작살은 물론이고 작살을 든 작살자비의 포즈, 두 척의 배가 합동하여 고래를 잡으려는 모습 그리고 포획한 고래를 끌고 가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 이 한 폭의 암각화 속에는 선사시대 대곡리 사람들이 이룩하였던 포경업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동안 이 암각화의 사실성과 더불어 당시의 포경에 관한 보편성을 파악해 내기 위하여 서유럽에서부터 극동에 이르기까지 과거 포경업이 성행하였던 지역들에 남겨진 포경 장면의 암각화들과 그밖의 유사 자료들을 찾아서 그 실상을 서로 비교하고 또 검토해 보았다.

다 시 말하자면, 우리들은 그동안 제작 시기도 다르고 또 그림이 그려진 공간도 다른 여러 지역의 포경도를 한 자리에 모아 비교해 보았다. 저 서유럽의 비스케만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포경업에 종사하였던 바스크족이나 인도네시아의 오지 라마렐라족의 고래잡이에 이르기까지. 그와 더불어 노르웨이의 피요르드와 카렐리아의 백해 그리고 베링해협 인근의 페베크 만 등 세계 각지의 선사시대의 바위그림 속에 남겨진 고래잡이 그림들을 함께 살펴보았다. 뿐만 아니라 뼈나 토기 그리고 그 밖의 각종 조형예술품들 가운데 시문된 포경 장면 등도 비교대상이었다. 물론 우리들은 이들을 통하여 가장 오래된 작살자비의 모습과 그 변형들을 살펴보았다.

이른 것은 석기시대부터 그려졌으며, 늦은 것은 최근에 제작된 포경 관련 그림들이 모두 비교 대상이었다. 일련의 비교를 통하여 우리들은 적어도 작살포가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작살자비의 모습이 일관성을 띠고 있음을 살펴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곡리 암각화는 그것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임도 또한 살펴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역이 다르고 또 제작 시기가 달랐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남긴 사람이 달랐지만, 작살을 든 포수의 모습은 놀랍게도 서로 같거나 비슷하였음을 살필 수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작살자비는 언제나 양 손으로 작살을 들고 뱃머리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작살의 길이는 보통 작살자비의 약 세 배에 이르는 크기였다. 다시 말하자면, 작살자비의 키가 170cm라면, 작살의 길이는 510cm 정도인 셈이다. 작살자비는 작살의 2/3지점, 즉 작살의 뒷부분을 두 손을 치켜들고 고래를 향해 던질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이 렇듯, 세계 각지의 포경도 속의 작살자비를 통해서 작살자비의 기본적인 포즈를 추출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작살자비의 오래된 고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곡리 암각화 속에 그려져 있음도 주장할 수 있다. 더구나 대곡리 암각화 속에는 두 척의 배가 한 마리의 고래를 향해 접근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물론 두 척의 뱃머리에는 모두 작살을 든 작살자비가 각각 서 있다. 한 척의 배는 사공들이 노를 젓고 있는 모습이지만, 다른 한 척은 사공들이 노를 내려놓고 있는 모습이다. 이로써 한 척은 정지된 상황을 나타내고 있고, 다른 한 척은 고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이 두 척 이상의 배가 협동하여 고래를 잡는 장면을 형상화한 그림이 아직까지도 다른 지역의 선사시대 암각화 가운데서 발견된 예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두 척의 배가 협력하여 고래를 잡는 모습은 지금까지는 대곡리 암각화가 유일하다.

이 암각화 속에서 살필 수 있는 것처럼, 한 마리의 고래를 두 척 이상의 포경선이 협력하여 공동으로 포획하는 방법은 그동안 근대 선단식 포경업이나 일본의 ‘아미토리(網取り)식’ 포경업 등이 개발된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대곡리 암각화에서 바로 그와 같은 포경법이 이미 선사시대부터 개발되었음을 살피게 해 준다.

그 밖에도 대곡리 암각화 속에는 고래의 몸통에 작살이 선명하게 그려진 것도 있다. 작살의 끝은 고래의 심장이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고, 그것을 꽂아서 던졌을 창대는 보이지 않는다. 이로써 작살과 창대는 서로 분리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고래를 끌고 가는 포경선이 한 척 그려져 있다. 그러니까 이 암각화 속에는 포수가 고래를 발견하고 작살을 던져서 고래를 포획하는 전 과정이 형상화되어 있는 셈이다.

뱃 머리에 서서 작살을 치켜 든 두 명의 대곡리 포수들은 세계의 포경사를 다시 쓸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피요르드나 베링해협을 비롯하여 한반도의 동해안은 이른 선사시대부터 선진적인 고래잡이가 꽃을 피운 곳들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한반도의 동해안은 가장 적극적인 포경이 이루어진 곳 중의 한 곳임을 두 명의 뱃머리에 선 포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고래를 관찰하고 또 그것들을 구분하였으며, 그것들을 포획하기 위하여 파도와 싸웠던 사람들이다.

또한 이 암각화는 그것을 남긴 사람들이 좌초되어 해안가로 떠밀려온 고래를 잡았던 소극적인 어부들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암각화 속에 그려진 모두 60마리 이상의 고래들은 하나 같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제작자들은 고래의 가슴과 등 그리고 꼬리지느러미의 차이, 배의 줄무늬, 입의 모양 등을 각각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각각이 서로 다른 종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러한 차이로써 이 암각화 속에는 모두 11종의 고래가 그려져 있음도 살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차이는 적극적인 관찰의 결과임을 말해준다.

대곡리 암각화와 같이, 하나의 바위 표면에 이렇듯 많은 수의 고래형상이 그려진 예를 살피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그 고래들을 잡기 위하여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사람들을 형상화한 그림도 또한 그 예가 흔하지 않다. 우리들은 대곡리 암각화를 통해서 태화강의 선사 문화와 그 선진성을 보다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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