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리 용맹한 작살자비 촉·투창방법, 문명의 새벽 개척
대곡리 용맹한 작살자비 촉·투창방법, 문명의 새벽 개척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3.04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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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보내준 선물 바다의 지배자 고래
온 정성 다해 운명적 만남 숨죽여 준비
작살 꼬나든 포즈 동서고금 모범답안
일본 등 포경업 암각·기록화의 전형
많은 시행착오 후 정형화 포즈 완성
고 래! 신이 보내준 선물. 아니, 오히려 선사 시대 대곡리 사람들에게는 고래 그 자체가 어쩌면 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작살을 꼬나들고 뱃머리에 서서 그 불가사의한 존재인 고래를 주시하는 저 작살자비. 그는 그렇게 온 정성을 다해 신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 그는 가장 엄숙하고 또 경건하게 그의 작살을 위로 치켜들고 운명적일 수밖에 없는 만남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저 섬처럼 떠다니는 꿈의 덩어리 고래가 불쑥 눈앞에 모습을 드러낼 그 때를 그는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겸손하고도 또 정직한 그는 금방이라도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고래를 기다리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가 작살을 치켜든 그 순간, 세상 그 어디에 그보다 더 당당하고 또 완벽한 이가 있었을까?

세상에 그 어떤 만남이 그 순간 그가 예감하면서 기다렸던 것 보다 극적이고 또 드라마틱한 것일 수 있을까?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또 온 힘을 모아서 신의 선물이 모습을 드러낼 그 순간을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 말로 그는 그의 모든 감각기관을 총 동원시켜 필살의 일격을 날릴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팽팽하게 감돌던 그 긴장감은 어느새 적막함으로 바뀌었고, 그리고 숨 막힐 듯한 정적의 시간은 그대로 정지되어, 작살자비도 노를 젓던 사공들도 그리고 고래들도 고스란히 그대로 굳어 화석이 되어버렸다. 금방 막 끝날 것 같던, 저 숨 막힐 것 같았던 긴장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변의 포즈가 되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선사시대 대곡리의 작살자비가 취하고 있는 포즈이다.

그렇다. 지금은 그 어디에도 저토록 늠름했던 대곡리 작살자비의 이름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몸으로 체현하였던 저 아름다웠던 포즈는 그 후 가장 완벽한 모범 답안이 되었고, 그의 후예들이 지속적으로 채택하였으며 그리고 불문율처럼 모두가 따라야 하는 전형이 되었다. 그에 따라서 대곡리의 작살자비가 완성하였고 또 그의 후예들이 즐겨 애용하였던 저 포즈를 세계 각지의 암각화를 비롯한 조형물 가운데서 살펴낼 수 있다. 뱃머리에 서서 고래를 잡는 포수나 동물을 사냥하는 사냥꾼 그리고 적을 공격하는 전사들의 모습 등 대곡리 작살자비의 변형들을 세계의 선사 및 고대 미술 가운데서 살펴낼 수 있다.

이 미 앞에서 살펴보았던 페그트이멜이나 잘라부르가 등의 선사 시대 암각화에서부터 근대 포경업의 선구자인 바스크 족의 기록화 그리고 근대 일본의 고래잡이 판화 가운데서도 대곡리 작살자비와 똑같은 포즈로 고래를 잡았던 그의 후예들을 만날 수 있다. 그것들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네무로시 벤텐지마(根室市 弁天島) 패총에서 출토된 새 뼈로 만들어진 침통이나 북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에 사는 누트카 족의 모자 등에 그려진 고래잡이 장면 가운데도 작살자비는 모두 대곡리의 포수와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어디 그것뿐일까? 비단 고래뿐만 아니라 육지동물을 창으로써 사냥하거나 창을 들고 싸우는 모습 가운데서도 대곡리의 작살자비와 비슷한 모습을 살펴낼 수 있다.

바위그림 속의 사냥꾼이나 전사들은 모두 흥미롭게도 두 손으로 창을 위로 치켜들고 목표물을 향해 던지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노르웨이 트롬쇼의 사슴 사냥꾼, 스웨던 보후슬렝 타눔 암각화 속 산양이나 소 사냥꾼, 키르기스스탄의 볼쇼이 차츠케이 암각화 속의 전사들, 몽골의 돈드 햐린 혼드 암각화 속의 기마 전사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선사 및 고대 바위그림 가운데 창을 들고 동물을 사냥하는 사냥꾼이나 적을 향해 창을 겨냥한 전사들의 모습은 모두 두 손으로 창을 치켜들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속의 기마전사도 대곡리 암각화 속 작살자비와 대동소이한 모습으로 창을 꼬나들고 있다. 그러니까 대곡리 암각화가 그려진 후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고구려의 전사들은 마치 대곡리의 작살자비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창을 들고 적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작살이나 창을 두 손으로 치켜들고 던지는 방법이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변하지 않았다는 점은 곧 대곡리식 작살 사용 방법이 여전히 유효함과 아울러 아직도 그것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지 못했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그 러니까 어찌 보면 단순하다 못해 하잘 것 없이 보이는 저 동작 하나는 실로 문명사의 획기(劃期)를 구분해 주는 일대 사건이었음을 살펴낼 수 있는 것이다.

저 대곡리의 작살자비 이전에 누가 바다로 나가서 감히 고래와 맞설 수 있었단 말인가? 저와 같은 포즈를 우리들은 대곡리 암각화 속 포수 이전의 그 어디에서도 살펴낼 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의 후예들은 이후 근대 포경포가 개발되기까지 실로 수천 년 동안 바다에서 땅위에서 그리고 마상(馬上)에서 지속적으로 저와 같은 방법을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대곡리 암각화 속의 포수가 취하고 있는 저 동작 하나를 통해서 우리들은 그동안 끊임없이 의심받아 왔던 적극적인 포경의 실체를 보다 분명히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와 더불어, 저 포즈가 정형화되기까지 대곡리의 고래잡이들이 겪었을 작살 개발의 산통이 또한 얼마나 극심하였을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대곡리 암각화 속의 포수가 취하였던 바로 저 동작 하나 속에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응축되어 있는지도 살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그의 조상들이 작살과 그것의 사용법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지?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 아버지와 아저씨 그리고 그와 그의 동료들이 얼마나 고심참담한 순간과 절망 그리고 좌절을 겪었을 지 등에 관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곡리 고래잡이가 취했던 저 간결한 포즈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도와 실패 그리고 도전 등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신 은 선물을 보내주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아무나 그저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취하기 위하여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들은 저 절대무한대의 공간 속을 수천 년의 오랜 시간 동안 정해진 계절에 맞춰 중단 없이 회유하여 왔다가 또 되돌아갔지만, 그것을 포획하는 일은 요원하기만 한 것이었다. 자신의 몸보다 천 수백 배나 더 큰 저 고래를 선물로 삼기에는 그가 안고 있는 육체적 조건들이 너무 열등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열등한 조건에 대한 자각이 곧 인류 문명사의 첫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선사 시대 대곡리의 포수는 그가 안고 있었던 불리한 육체적 조건을 극복해 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고래와 당당히 맞서게 해 준 것은, 저 대곡리 암각화 속 고래잡이의 손에 들려있는 당대 최첨단 공학의 결정체 작살이었다. 작살은 인간이 고래를 비롯한 포획대상 동물들에게 치명상을 가하는 공격 용구였으며, 그것은 작살 촉(舌頭), 창대 그리고 로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공격이 성공한 이후, 그것의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공기 저항용 부낭이나 통나무 등도 보조용구로 활용하였다. 그의 손에 바로 그 작살이 들려진 순간, 저 무한의 바다를 지배하였던 고래들과 그는 비로소 마주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문명의 새벽을 개척한 선구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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