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에 스승이 없다
모교에 스승이 없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4.29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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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변화하며 바뀌게 되어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만 안 변한다. 가장 천천히 변하는 것이 생물의 진화이고, 가장 빨리 변하는 것이 정치의 혁명이다. 한 사람의 변화도 신체적 변화는 유아기 때와 노년기(老年期) 때 가장 빨리 변하고 젊었을 때는 조금씩 변한다. 사람의 지적 변화(知的 變化)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특히 여름 방학 전과 여름 방학 다음이 뚜렷하게 변화의 차이가 관찰된다. 지적 변화가 잘 나타나지 않는 때는 노년기이다. 그래서 핸드폰(cellular phone)이 새로 나왔다고 해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능을 배우려면 지적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데 대부분의 노인들은 뇌가 이런 변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물론 예외가 있다. 정신분석학의 유명한 오이드푸스(콤플렉스) 이야기를 쓴 사람은 80대에 이 작품을 발표했다. 일컬어 개인차가 있다. 그래도 사람의 지적 변화는 정적 변화(情的 變化)에 비하면 상당한 변화가 계속 되는 편이다. 사람의 정적 분위기(상태)는 잘 형성되지도 않지만 한번 형성되면 잘 변화하지도 않는다. ‘그 놈의 정(情) 때문에’라는 말이 한 번 정이 들면 끊기가 어려워서 하는 말이다. 물론 경험적 결과로 얻어낸 지혜로운 말이다.

사립학교는 제외하고 모든 공립학교는 교사와 직원이 순환제 근무로 전근을 해야 한다. 표면적 이유는 그럴듯한 ‘민주주의 다양성’으로 이런 학교도 근무해보고 저런 학교도 근무해 본다는 취지이다. 그러나 숨어있는 사실은 좋은 조건의 학교(아주 옛날 서울에서는 촌지가 많이 들어오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에서 좋은 학교가 결정되었다)에 누구만 오랫동안 근무하게 하느냐의 불평에서 나온 제도이다. 순환제 근무 때문에 선생님 한분이 한 학교에 길어야 5년(?) 정도 근무한다. 짧게는 1년 또는 2년 근무하고 전근을 한다. 그러다보니 각 학교 교무실 선생님들의 분위기는 모래알 분위기이다. 서로가 간섭하지 않고, 따라서 정도 주지 않고 받지도 않으며 한 1년 충돌하지 않고 대충 지내자는 ‘제 각각 분위기’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학생들의 ‘인성(人性)’지도가 진지하게 시행될지 의문이 앞선다. 미운 정 고운 정은 교무실에서 한동안 서로 부딪쳐야 드는 것이다. 그래야 남의 반 학생도 학교 안에서나마 인성지도를 하게 된다. 학생의 인성교육도 수년간 이렇게 상호작용을 해야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본인이 희망하면 한 학교에 오래 근무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집도 학교 근처로 이사 오고, 동네 아이들에게도 ‘우리 선생님 집이 저기야’로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

졸업을 하고 옛날이 그리워, 그래서 어머니의 모(母)자를 붙여 모교라고 하는 정든 학교를 찾았는데 건물도 바뀌었지만, 나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이 한 분도 안 계신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상상해보자. 이런 분위기에서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엽서 한 장, 지금은 종이 냄새도 없는 이-메일로 겉치레만하고 하루를 넘긴다. 이렇게 정이 없는 형식적 행사라면 스승의 날은 없느니만 못하다. 정으로 사는 진지한 스승에게 욕을 먹이는 것이다. 모교에 스승이 계실 수 있도록 제도를 검토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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