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형상에 고래일생 담아낸 뛰어난 관찰력
단 하나의 형상에 고래일생 담아낸 뛰어난 관찰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12.25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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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지느러미 크기·흰 배는 참고래 큰 특징
배-꼬리지느러미 연결 출산과정 짐작케 해
현대에도 목격하기 힘든 희귀장면 고스란히
북방긴수염고래는 아치형으로 생긴 입, 두 개의 분기공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 등지느러미가 없는 점, 다른 수염고래들에 비할 때 타원형으로 폭이 넓은 가슴지느러미 그리고 몸통에서 꼬리자루로 이어지면서 다이내믹하게 표출되는 운동감 등으로 여느 고래와는 쉽게 구분이 된다. 이 암각화 속에서는 그와 같은 형태적 특징을 갖추고 있는 형상이 몇 개 더 살펴진다. 이미 살펴보았던 세 마리의 북방긴수염고래와 암면 왼쪽 아래에 거꾸로 그려진 고래 사이에 꼬리 자루부분만 남은 형상이나 암면의 중간 아래 부분에 등선이 심하게 휜 고래 등이 그것이다.

세 마리의 북방긴수염고래 아래에는 입과 배 부분을 띠처럼 남겨 두고 쪼아서 그린 또 한 마리의 고래형상이 보인다. 그것은 측면에서 포착한 고래를 형상화한 것인데, 등에는 선명하게 등지느러미가 그려져 있고 또 배 부분에도 타원형의 무엇인가가 달려 있다. 그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등으로 이어지는 머리 부분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등지느러미는 전체 몸통의 2/3지점에서 솟아 있는데, 그 끝은 뒤로 향하고 있다. 등과 배 사이를 길게 띠처럼 남겨두고 쪼았는데, 그것은 절묘하게도 입의 아래위를 구분 짓는 역할과 동시에 배와 등 부분에서 보이는 색의 차이를 나타내는 역할을 겸하고 있다.

고래 가운데서 향고래나 흑범고래를 제외한 이빨고래 아목은 대부분 머리 부분의 끝에 뾰족한 부리가 나 있다. 또한 등지느러미는 몸통의 중간 부분, 즉 전체 길이의 1/2지점에 비교적 높이 솟아 있다. 그러므로 이 고래 형상은 이빨고래 아목 중 어떤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 형상은 수염고래 아목 가운데 어떤 종을 형상화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수염고래 아목 중에서 대왕고래는 등지느러미가 매우 작고 낮으며, 그것도 신체의 약 3/4 지점에 솟아 있다. 참고래는 등지느러미가 신체의 2/3지점에 솟아 있고, 또 그 높이는 약 60cm 이상이며, 등 표면과 이루는 각이 약 40도 정도라고 한다. 보리고래는 참고래에 비해 등지느러미가 수직에 가까우며, 브라이드고래나 밍크고래는 신체의 2/3 지점에 등지느러미가 나 있으나 참고래보다는 훨씬 낮게 솟아 있다. 혹등고래나 북방긴수염고래 그리고 귀신고래 등은 가슴지느러미가 매우 길거나 넓적하게 생겼고 또 등지느러미가 없는데, 이런 점이 그림 속의 그것과 다른 부분이다.

따라서 이 형상은 참고래나 브라이드 혹은 밍크고래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브라이드나 밍크고래의 등지느러미는 참고래보다 낮게 솟아 있다. 이 고래 형상에서 등지느러미의 크기를 살펴보면, 그것은 신체의 약 1/12에 이를 정도의 높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이 고래의 길이를 18m라고 가정할 경우, 그 지느러미는 약 150㎝에 이른다. 이러한 점으로써 이는 참고래를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참고래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배의 색이 희다.

바로 이러한 점으로써 이 형상은 수염고래 아목 중 참고래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칠 수 있다. 그러니까 대곡리의 선사 시대 화가는 참고래의 특징을 완만한 타원형의 머리 부분과 비교적 높으면서 뒤로 누운 등지느러미 그리고 흰 색의 배 부분 등에서 찾아내었던 것이다. 대곡리 암각화 속에서 참고래로 보이는 형상은 이것 밖에는 없는 듯하다. 알려진 것처럼, 참고래는 대왕고래 다음으로 큰 신체를 갖고 있는데, 성숙한 것은 그 몸통의 길이가 약 17~18m에 이르며, 임신기간은 11~12개월 정도이고, 그 새끼의 크기도 6m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한반도 연근해에서 연중 관찰되며, 겨울철에 번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몸통 중 쪼지 않고 남겨진 흰 배의 끝 부분, 즉 배의 중간 부분에 아래로 타원형의 무언가가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뒤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타원형에 꼬리지느러미가 갖추어진 이 형상의 전체적인 윤곽을 놓고 볼 때, 그것은 작은 고래를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작은 고래의 꼬리지느러미 부분이 참고래의 배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크고 작은 고래 형상들을 두고 우선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참고래의 출산 과정이다.

고래는 포유동물이다. 포유동물의 특징은 암수가 짝짓기를 하고, 체내 임신을 하며, 약 11~12개월의 임신기간을 거쳐 출산을 한다. 어미는 태어난 새끼에게 젖을 먹여서 양육한다. 어미는 새끼가 태어나면 먼저 첫 호흡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런 다음 새끼는 젖을 먹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수염고래 아목의 새끼고래는 어미의 약 1/3정도이지만, 빠르게 성장하여 이유기에 이르면 15m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염고래 아목은 10세 전후에 암수의 성징을 고루 갖추며, 수명은 약 100세에 이른다.

배 부분의 새끼 고래는 그 크기가 어미고래의 약 1/3에 해당하는데, 이러한 정황을 놓고 볼 때 이 형상은 참고래의 출산 장면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 막 어미의 체내에서 바깥으로 나온 새끼의 모습을 형상화 해 놓은 것이다. 선사시대 대곡리 화가는 어미고래가 산고 끝에 새끼를 낳은 모습, 즉 새끼가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을 이토록 생생하게 목격하였던 것이다. 물론 고래가 새끼를 낳은 모습을 형상화한 선사 및 고대 암각화는 지금까지 알려진 예가 없으며, 현대의 많은 고래 전문가들도 과학적 장비를 갖추고 장기간의 기획 조사를 하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은 상황을 눈으로 목격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대곡리 암각화 속에는 참고래의 출산 장면이 이렇듯 적나라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누구든 알지 못하는 것을 논하거나 그릴 수 없으며, 직접 보거나 듣지 못한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런데 대곡리의 고래잡이 어부를 비롯하여 당시 이 암각화를 남긴 화가들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살피기 어려운 참고래의 출산 과정을 목격하고 태어난 새끼를 이렇듯 정확하게 형상화해 놓았다.

대곡리 암각화의 270개 형상 중 하나인 이 형상은 그것의 겉모습 이상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형상은 겉으로는 출산 장면을 그려놓고 있지만, 그러나 바로 이 장면 하나에는 고래의 일생이 축약되어 있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형상의 이면에는 어미고래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었을 수많은 사연, 즉 생의 대드라마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형상은 새로이 태어난 새끼고래의 미래도 또한 암시되어 있다. 바로 그 출산 광경을 대곡리의 어부와 화가들은 숨죽이며 지켜보았을 것이고, 그 순간의 진실을 그들은 건너각단의 한 귀퉁이에 정착시켜 놓았던 것이다.

이 작은 형상 하나를 통해서 우리들은 선사시대 대곡리 어부들과 화가가 목격한 고래의 탄생 순간과 그 신비 그리고 환희를 재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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