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전화앵과 난희가 그립다
기생 전화앵과 난희가 그립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12.18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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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전화앵의 명성은 이미 고려 땅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 산 57번지, 35번 국도변 야트막한 언덕에는 고려에 의해 망해가는 신라 땅에 살았던 동도(東都) 기생 전화앵(轉花鶯 900~1100년 추정)의 무덤이 있다. 동도는 고려인들이 신라 서울 서라벌을 경주라 고치고 동도라 불렀으며, 고려국의 서울 평양은 서도(西都)라 했다.

1530년 조선 중종임금 재위 25년에 어명을 받아 증보한 전국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경주부 고적조 열박령(悅朴嶺)편에 전해오는 전화앵 관련 내용을 보면, 열박령은 경주부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동도 명기 전화앵이 묻힌 곳이다(悅朴嶺在府南三十里 東都名技口轉花鶯所埋之地)라고 기록했다. 1669년 조선 현종임금 10년 경주 부윤 민주면(閔周冕)이 간행한 동경잡기(東京雜記), 권 2 고적편 열박령조 역시 같은 내용이며, 고려 명종 임금 당시 문신으로서 농민들의 모습을 꾸밈없이 노래한 농민시의 개척자로 더 알려진 김극기(金克己 1150년경~1204년경)가 그녀를 노래하는 글도 함께 정리해 두었다. 이 기록을 보면 비록 설화 속의 그녀이긴 해도 더욱 사실로 와 닿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옥 같은 용모의 혼을 재촉해 간지 오래인데 하늘 끝에는 다만 층층한 산꼭대기만 나타나네, 신녀(神女)는 비를 무협(巫崍)에서 거두고 아름다운 이는, 바람을 낙천(洛川)에서 끊었네, 구름은 춤추는 옷자락처럼 땅에 끌리고 달은 노래하는 부채인양 하늘 높이 떠 있네, 지나가는 길손이 몇 명이나 꽃다운 자질을 슬퍼하여 수건 가득히 피눈물을 흘렸을까.’

신라 천년의 금빛 찬란했던 문물은 그야말로 떠오르는 고려의 기상에 눌려 얼음이 녹듯이 사라짐을 마주하고 있을 때 서라벌에 남아 있던 기생 전화앵이 서글프고 답답한 심정을 날려버리려고 발품 팔아 서라벌에서 남쪽으로 30리 떨어진 열박령을 자주 찾았으리라.

전해오기를 신라를 가지러 온 왕건을 위해 임해전에서 배풀었던 술자리에서 화류춘풍(花柳春風)에 취한 고려 장수들이 이르기를, “전화앵아 너도 송도로 같이 가자. 망국(亡國)의 땅보다는 새로운 나라 고려 땅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을 때, 단연코 말하기를 “그럴 수는 없답니다. 천한 기생 신분으로서 어디 간들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저물어 가는 저 열박산에 걸린 햇살과 함께 이 땅에서 지낼 것이요”라고 하며, “절조가 없는 망국의 사대부들아, 남의 나라로 잘 가거라”라고 한탄했다고 전해 온다. 그야말로 꾀꼬리 같은 목소리는 절망에 찬 함성을 토했으며 전화앵은 오랫동안 서라벌 땅 활천리에서 살았다고 한다.

가끔 고려의 관리들이 전화앵을 대령시켜라 목소리를 높이면 “그녀는 몸도 넋도 모두 신라를 따라 갔소이다. 열박령의 산신이 되어 갔소이다”고 하며, 나라 잃은 백성은 그녀를 기렸다고 한다.

활천마을 일대에서 전해 오기를 그녀는 이 마을에 기근이 들어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의 재산을 내어 마을 사람들을 보릿고개의 어려움에서 구했다고 한다. 이후 오랫동안 활천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그리워하면서 마을 가까이에다 그녀의 묘를 세워 관리해 왔었다고 전한다. 울주군 두서면(蔚州郡 斗西面)의 내와리(內瓦里)와 상북면 소호리(上北面 蘇湖里)의 사이에 높이 솟은 열박령(咽薄嶺)은 밝고 광명한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라 명장 김유신(金庾信)이 청년 시절에 수련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어 신성시한 산이다.

기녀 (妓女) 난희는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1950년)가 지은 소설 마의태자에 등장하는데 전화앵과 겹쳐서 떠오르는 인물이다.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김충(金忠, 김일(金鎰)의 소설 속의 이름, 후에 마의태자로 불림)은 위기를 당한 나라를 살리기 위한 방책이 떠오르지 않는 위급한 상황 아래 놓여 있으면서 왕건의 화살을 피해 왕실을 떠나 깊은 밤 술자리를 마련한다. 왕자로서 자신의 무능을 탓하면서 끓어오르는 울분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망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기생 난희에게 이르기를 “너는 다시 나를 보려고 생각지 말아라. 좋은 장부에게 시집가 잘 살아라”하고 허리춤에서 남은 금은을 쏟아 주고 일어나려 하였다. 이때 난희는 김충의 소매를 붙들며 “국사(國事)라 하옵시니 첩이 막지 아니하리이다. 그러하오나 첩의 몸은 이미 마마께 바치었거든 다른 사람(나라)에게 갈리는 만무하옵니다. 몸이 비록 마마를 따르지 못하더라도 첩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마마를 따르는 줄 아옵소서”하고 흐느껴 울었다.

한편 여기서 독립운동가로서 변심 않고 결코 매국하지 않고 싶었다는 작가 춘원이 자신의 변명을 난희를 앞세워 내 보인 듯하여 나라 없는 백성의 슬픈 일면을 짐작하게 한다.

왠지 별다른 연 말에 애잔한 두 명기의 붉디붉은 단심가(丹心歌)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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