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의 윤리성
언론사의 윤리성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4.2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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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무가내(莫無可奈)는 서울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 남대문에 문턱이 있다고 우길 때, ‘막무가내’로 우긴다고 한다. 이 사람이 막무가내이면서 하나는 지키는데, ‘야, 남대문은 문이지? 문에 문턱 없는 경우가 어디에 있어? 그러니까 잔말 하지 마. 남대문에는 문턱이 있어! 가보지 않아도 뻔한 거야. 알았어?’라고 하나의 논리, 자기 고집에 맞는 논리는 지킨다. 그러나 남대문에는 문턱이 없었다.

울산광역일보가 막무가내로 ‘창간 10주년’을 외치고 있다. 경성(서울)의 모 일간지가 일제 강점기에 폐간 당했다가 복간하면서 발행 호수를 이어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정인데도 막무가내로 창간 10주년이라고 한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부터 정간, 폐간 당한 것도 아닌데, ‘광역일보’라는 이름과 ‘울산광역일보’라는 이름이 거의 같다고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면 울산 시민들이 잘 알아서 판단할 것이기 때문에 더 따지지 않겠다. ‘광역일보’라는 낱말이 들어있으면, 남대문에 문턱이 있듯이 ‘울산광역일보 창간 10주년’이라고 해도 된다는 막무가내이다. 울산의 언론사가 이렇게 막무가내이기 때문에 ‘울산에 울고 들어왔다가 웃고 나간다’는 말이 전국에 퍼지는 것이다. 왜 울고 왔다가 웃고 떠날까를 잘 새겨야 한다. 새로 생긴 동네, 수많은 공장 지대, 전통 문화의 특징이 없는 동네, 어른이 없는 동네, 물가 비싸고, 거칠고 억지가 통하는 사람들 등등, 정이 들 만 한 것은 하나도 없는, 막무가내가 판을 치는 동네에 살아야만 하는 내 신세가 서러워서 울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도 꾹 참고 잘 견디어 임기를 채우거나 돈을 좀 벌어서 울산을 떠나게 되었을 때, ‘어휴, 이제 울산을 떠나게 되어서 기분 좋다’하고 웃는 것이다.

언론사의 윤리성은 독자들에게 귀감(龜鑑)이 되어야 한다. 정든 고장, 울산을 떠나기 싫어서 울고 떠나는 고장이 되기 위해서는 언론사가 하찮은 일도 그것이 정도(正道)라면 철저하게 지키는 모습을 시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영국신사는 여자가 도움을 청할 때, 이유 없이 도와주어야 한다. 따라서 ‘007영화’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쫓기면서도 낯모르는 할머니가 카트에 짐을 실어달라고 요청하면 도망가던 발을 멈추고 도와주어야 한다. 영국신사는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론사는 독자,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모든 일에 정직해야 한다. 언론사가 정직하다는 것은 시민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다. 언론사 사원이기 때문에 야유회 가서 점심 도시락을 먹었던 장소를 깨끗하게 치워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한테 공중도덕을 바로 지키도록 독려 할 수 있다. 언론사 사무실은 희희덕 거리며 잡담하지 않는다. 남을 배려하는 기본을 지키도록 신문에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사는 사실만 보도 한다며 위장하여 인신공격을 하지 않는다. 하여간 언론사는 날짜 계산을 정확히 한다. 대개의 신문은 창간일 또는 발행 호수를 정확하게 표기한다. 이것을 어지럽게 적당히 얼버무리면 시민을, 독자를 우롱(愚弄)하는 것이다. 바보가 아닌데 바보로 취급하여 놀리는 것이다. 즉, 언론사가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이다.

본보가 창간되었을 때, 정직성에서 위험함을 자각하는 기관은 ‘또 신문이야?’라고 했을 것이다. 여기에 본보는 진정 귀감이 되는, 특색이 있는 지방지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모습으로 시민들에게 보답하겠다고 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커다란 약속인지 요즈음 실감하고 있다. 본보 논설실에는 ‘직필정론(直筆正論)’이라는 네 글자가 언론이 나아 갈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언론사의 윤리성은 직필정론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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