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속의 외국인
울산 속의 외국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4.2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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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이 항복하고 백제가 멸망했을 때 주위의 장군 1백 여명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한 장수가 흑치상지다.

‘흑치’란 검은 이빨을 뜻하는 한자어이기 때문에 이 사람의 치아가 검었음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남방 유구열도나 베트남 원주민들은 치아가 부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열대림에서 나오는 열매의 검은 액즙을 이빨에 바르는 습속이 있었다. 이빨을 검게 칠하고 다니는 이 장수의 특징을 본 따 ‘흑치’란 이름을 지었을 것이란 추리가 가능하다. 이로 미뤄보아 당시 백제에는 남방계 이민족이 거주했거나 최소한 내왕이 잦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충렬왕 때의 가요인 ‘쌍화점’이 고려사 <악지>에 실려있다.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는데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쌍화점은 만두집을 뜻하고 이 집 주인인 ‘회회아비’는 몽고인, 즉 서역에서 몽고로 들어와 고려로 건너온 무슬림이란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울산과 깊은 관련이 있는 처용설화도 이국인이 우리지역에 살았음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9세기 울산항, 당시 개운포에는 곳곳에 아랍상인들로 붐볐다. 수도 경주를 배후에 둔 울산항은 천연적인 지형조건과 내륙으로 통하는 교통요지로써 명실 상부한 국제무역항이었다. 당시 이 무역항에 거주하던 상당수의 외국인은 서역인 이었다는 기록이 아랍문헌과 신라고지에 나온다.

무성한 눈썹, 푹 패인 쌍꺼풀 눈, 우뚝 솟은 코, 검붉은 얼굴색 등 처용 탈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처용의 얼굴은 아라비아인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에 놀러 갔다가 궂은 날씨를 만났는데 동해 용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췄다. 일곱 아들 중 한 명이 처용이었는데 동경(경주)으로 데려가 벼슬을 내렸다」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유추할 수 있다.

「동해로 유람차 나갔다가 날씨가 좋지 않아 개운포에 묵게되자 그 지역에 살던 이방인 7명이 왕 앞에서 고유의 춤을 선뵀다. 이를 보고 신기하게 여긴 왕이 그 중 한 명을 궁궐로 데려가 벼슬을 주면서 궁궐전속 무용수로 삼았다」 설화 속 외국인들이 울산지역에 많이 살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15세기 초 무렵 조선정부는 무역을 위해 바다 건너 영내에 들어오는 일본인들을 통제하고 견제키 위해 3포에 왜관을 설치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왜관 가까이에 집을 마련하고 처자를 거느리고 사는 왜인이 증가했다. 3포 개항지 중 하나였던 울산 염포에는 36호 1백31명의 일본인이 살았다.

현재 울산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76개국, 1만3천 여명에 이른다. 지역 내 중소기업, 서비스업, 대기업 전문 인력 등으로 울산 지역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3D업종에 종사하는 외국인 근로자나 이주여성들을 위한 각종 지원책, 상담창구도 마련되고 있다. 울산시는 ‘재울 외국인 국경일 기념’국기게양 희망 외국인을 모집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9세기 개운포항에 머물던 외국인 거리에 그들의 국기가 게양되는 셈이다. 외국인 거주자가 증가하면서 그들에 대한 배려, 지원 못지 않게 불상사도 종종 생기고 있다. 외국인 이주여성을 아내로 둔 한국인 남편이 아내의 전 직장동료에게 “성폭행 혐의로 고소하겠다”며 협박을 해 금품을 갈취한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고 한다. 신라 헌강왕 당시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타임머신이라도 있으면 타고 되돌아 가 보고 싶다.

/ 정종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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