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항아리와 옹관(甕棺)
태항아리와 옹관(甕棺)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10.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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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태(胎)를 담아 묻었던 태항아리는 부모로부터 가장 처음 받은 선물이다.

사자소학(四字小學)을 열면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풀이하면 신체와 머리카락, 피부, 장기는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훼손하거나 다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임을 배운다. 부모와 자식을 이어 준 지극한 애정의 상징물인 태를 고이 간직하고자 항아리에 담아 땅 속 태실에 묻는다.

세종대왕의 백자 태항아리가 현존하는 조선시대 백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조선왕실의 의례이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출생한 아이의 태를 버리지 않고 작은 백자로 된 ‘내호(內壺/태항아리)’에 넣어 산모의 방에 보관했다가 생후 7일째 태를 백 번 씻어내는 세태(洗胎) 의식을 거행하고, 안태사(安胎使)를 정해 태봉지에 안장했다. 태실이 설치될 경우 군현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고 영역 확대 등의 특혜를 입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도 태반을 중요하게 여겨, 파라오(왕)의 태를 잘 보관하고 있다가 그가 죽으면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울산박물관에 가면 1458년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곡연마을 태봉산 정상에 묻었던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의 딸 경숙옹주(敬淑翁主) 태 항아리가 전시되어 있다.

외고산 옹기문화관 입구에선 전국 각 지역에서 발굴된 어린이용 옹관을 볼 수 있다. 주검을 모신 항아리를 옹관이라 한다. 참고로 옹관묘의 성행시기를 살펴보면 한반도는 초기 철기시대인 삼한시대이며, 중국 지역은 전국·진·한(戰國·秦·漢)시대, 그리고 일본 열도엔 야요이(彌生 B.C.300~A.D.300)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한편 한반도에선 5세기 후반대로 추정되는 전남 나주시 오량동 토기요지(사적 제456호) 발굴 현장에서 대형옹관을 구운 굴 터와 그 폐기장이 대거 확인됐는데, 일본의 큐슈지역의 요시노가리유적에서 발굴된 옹관묘와 관련성이 있다고 발표되고 있다. 울산에서도 2001년 사연리 늠네유적에서 삼한시대의 옹관묘 3기의 출토를 시작으로 효문동 율동유적, 화산리 옹곡유적 등지에서 잇따라 확인되고 있다.

옹기 문화관 전시실의 아이용 옹관에선 짐승들로부터 주검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옹관을 볼 수 있다.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다른 그릇에 비교하면 상당히 애써 만든 그릇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부모가 죽은 자식에 대해 지극한 사랑을 담았음을 엿볼 수 있다.

아이의 주검이야기로 가장 오래 된 것은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 후기 유적인 충북 청원군 두루봉 동굴 유적에서 본 ‘흥수아이’가 있다. 발견자 김흥수의 이름을 딴 것으로 7살 정도로 짐작하며, 구석기 때에 살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부모가 이승을 떠나보내는 이 아이의 가슴위에 향기로운 들국화 꽃을 뿌려 주었다고 하는 발표에서,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그 애절한 전설이 현실이었음을 확인했었다.

이융조의 ‘우리의 선사문화’에서 정리해 보면, 고인돌[支石墓] 무덤시기가 지나가면 독무덤(甕棺墓 옹관묘)이 나타난다.

청동기시대의 독무덤은 독을 1개 이용하여 만들고, 위쪽에는 넙적한 돌 같은 것으로 뚜껑을 덮은 외독(單甕棺)이 유지되다가 이후에는 외독에 뚜껑이 있거나 독을 2개 마주 보게 한 형식 등으로 변화되어 나타난다고 한다.

옛 사람들이 가진 태반의 중요성은 태실에서 확인된다. 태반은 어머니의 자궁 내에 수정 후 약 5주째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13주경에 완성되는 임시 장기로서 모체와 태아를 결합시키면서 양쪽을 구분하는 역할을 가진다. 태반은 태아에게 있어 소화기관 및 호흡기관, 배설기관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모체와 태아 간에는 서로 혈액이 섞이지 않으므로 응집반응이 생기지 않는 안전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최근 의학의 발달은 태반의 줄기세포를 이용해 난치병을 치료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천륜(天倫)으로 만난 부모와 함께 생명을 나누었던 태는 항아리에 담고 그 신체가 이승을 떠나면 옹관에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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