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는 신화의 소재이자 문명발달 촉진제
고래는 신화의 소재이자 문명발달 촉진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9.0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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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총·고대문헌 등 고래흔적 도처에 남겨져
암각화그림은 세계 어로역사 빛낼 기록사진
황성동 작살촉 박힌 고래뼈 적극적 포경사례
유무형자료 한반도 산업화·기술발전 원형질
울산을 중심으로 한 동해는 예로부터 ‘고래바다’로 불리어 왔다. 무리를 이루고 자맥질하는 고래들은 바다의 점령자들이자 주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없었다면 그 바다가 ‘고래바다’라 불리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떼를 이룬 고래들은 사람들이 그 바다를 주목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들이 정한 사이클에 맞춰 한반도의 동해안을 회유하였을 것이며, 그것들은 사람들이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바다의 주인이자 점령자인 그들과의 공생을 위하여 사람들은 고래를 공부하였으며, 그것을 실제 생활에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각종 장치와 도구들을 개발하였다. 그러한 일련의 노력들은 고래학의 근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 선사시대 시원 문화의 형성 과정을 더듬어가다 보면, 어디에서든지 고래와 만나게 된다.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구석기 시대의 주거지와 패총 등지에서 발견된 고래 틀과 고래 뼈 등이다. 또한 여러 종류의 고래와 배를 타고 그것들을 잡는 광경이 새겨진 암각화도 발견되었고, 그 포경 장면이 사실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작살이 꽂힌 고래 뼈도 발견되었음을 마침내 확인하게 된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각종 문헌 속에는 고래를 둘러싸고 벌어진 흥미로운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연안 지역 사람들은 ‘바다’ 이름도 고래라 하였고 또 ‘나루(津)’ 이름도 고래요 포구(浦) 이름도 고래라 붙여놓았음을 살피게 된다. 그러다 보니 연안지역 사람들의 머릿속이 온통 고래 생각으로 차여져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 정도이다.

한반도에서는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고래 모형을 제작하였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고래 틀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석기 시대의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이 유적지의 움막집에서는 그 크기가 53cm×17cm×9cm에 이르는 고래 모양의 틀이 발견되었다. 당시 이 유적을 발굴한 고 손보기 박사는 생전에 쓴 보고서와 글 속에서 그 틀 속에 석고를 부어 복원한 고래의 모형을 제시하였다. 그 고래와 그 틀은 선사시대 석장리 사람들이 이미 석기시대부터 고래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또한 그동안 부산 동삼동, 통영 상노대도, 김해 수가리, 서생 신암리, 황성동 세죽 등지의 고고학적 발굴 조사 과정에서 꼬리를 이어 고래 뼈들이 발견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하나씩 늘어난 물증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고래와 이들 지역 선사 시대의 주민들과의 친밀성에 대한 보다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 패총들을 포함한 유적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작살이나 어망추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로써 포경에 대한 조심스러운 추정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인 2010년 8월에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처용암 앞에서 작살이 박힌 고래의 뼈가 발견되었다. 수습한 고래의 등뼈와 어깨뼈에 각각 사슴 앞다리 뼈를 이용하여 만든 작살이 꽂혀있음을 조사단은 수습품의 보존 처리 과정에서 새롭게 살펴낸 것이다. 작살이 박힌 고래의 뼈는 그동안 상상과 추측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한반도 선사시대 사람들의 포경에 관한 가능성들이 허황한 가설이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었다.

나아가 작살이 꽂힌 고래 뼈는, 예의 몇몇 선사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래 뼈들이 좌초된 고래의 수습과 같은 소극적인 어로활동의 산물이 아니라 적극적인 포경활동의 결과 생긴 부산물이었을 가능성도 또한 높여주었다. 비단 고래 뼈뿐만 아니라 작살이나 그물추 그리고 그물이 압인된 토기 파편 등은 포경을 포함한 적극적인 어로 행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에 대한 신뢰할 만한 증거물이 되었다. 나아가 그러한 어로용구들이 실제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살피게 해 주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물이 우리 앞에 남아 있다. 그것은 세계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없는 울산 대곡리 암각화이다. 그 속에는 고래잡이 장면이 마치 기록 사진처럼 구체적이며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매장 유물이나 조형 예술품들은 모두 무 문자 시대의 한반도 선주민들이 남겨놓은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문헌 기록 가운데도 고래에 관한 흥미로운 대목들이 보인다. ‘삼국사기’ 14권 고구려 본기 4대 민중왕 편 4년 9월 조에는 ‘동해 사람 고주리가 고래의 눈(明月珠)을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는 구절이 있으며, 13대 서천왕 편 19년 여름 4월 조에는 ‘신성을 방문한 왕에게 해곡 태수가 고래의 눈을 바쳤는데 밤에도 광채가 났다’는 구절이 각각 기술되어 있다. 고래의 눈인 ‘명월주’로 등잔을 만들어 불을 밝히면 광채가 더 많이 났다는 이야기도 또한 구전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고래 및 그 신체 구조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 그리고 신체 기관의 일부를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등을 살피게 해 준다.

또한 고려 원종 14년(1273년) 조에는 ‘몽골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중서성의 편지를 가지고 함경도와 경상도에서 신루지(蜃樓脂)를 구하였는데, 신루지가 곧 고래 기름이다(達魯花赤以中書省牒, 往東界及慶尙道, 求蜃樓脂, 蜃樓脂鯨魚油也)’는 기록도 보인다. 고래 기름을 구하기 위하여 몽골의 벼슬아치가 정부 주요 기관의 편지를 지참하고 동해나 경상도로 찾아 왔다는 점은 한반도의 동해안이 일찍부터 고래 기름 생산지로 널리 알려졌음과 더불어 이 지역이 포경과 고래의 해체 그리고 신루지 생산 등 일련의 작업이 가능한 기반시설 및 기술 인력이 갖춰져 있었음도 추정하게 한다.

한편, 동해안 일대에는 고래와 관련된 지명들이 남아 있는데, ‘고래나루(鯨津)’과 ‘고래개(鯨浦)’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바다를 지칭한 말 가운데는 ‘고래바다(鯨海)’와 ‘고래가 노는 바다(鯨海濱)’라는 말들도 있다. 이와 같은 말들은 얼핏 들어도 주변에 고래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음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로써 함경도에서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해안에 살았던 고대 한국인들의 생활 속에서 고래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도 되짚어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래바다’와 ‘고래가 노는 바다’라는 말들은 울산을 중심으로 한 인근의 바다를 이르는 말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래와 관련된 이와 같은 유무형의 자료들은 이제 한반도 고래학의 형성 과정과 과학 기술 발전 그리고 산업화의 과정 등을 그려내고 또 그 원형을 복원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축적되었다. 돌이켜 보면, 저 넘실대는 푸른 바다 위를 떠다녔던 고래들은 한국 시원문화의 형성의 동인이었다. 그러나 그 고래들이 선사시대에는 작살을 만들게 하였고 또 고래바다는 포경선을 만들게 하였으며, 그리고 오늘날에는 울산 고래박물관과 암각화박물관 등을 만들게 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하물며 현대중공업이나 석유화학단지의 연원이 저 넘실대는 고래바다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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