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신화를 창조하는 영원한 화수분
생명과 신화를 창조하는 영원한 화수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8.2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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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불변의 가치·다양한 이미지 내포한 거대한 자궁
울산 앞 바다는 풍요·격랑 겸비한 활기찬 도전 장소
바다! 이 말만큼이나 다양하고 또 넓은 의미를 지닌 단어도 없는 듯하다. 이 말은 끝없음, 넓음, 깊음, 광활, 심원, 절대무한 등의 단어들을 연상시켜 준다. 그것은 언제나 다함이 없으며, 무진장한 것이고, 끝과 속을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것이었다. 그 속에는 다양한 미생물과 각종 플랑크톤, 그것들을 먹이로 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바다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생명체가 탄생한 곳이며, 아직까지도 가장 많은 생명체들이 또 서식하고 있는 공간이다.

그것들이 펼치는 끊임없는 탄생과 성장 그리고 소멸의 드라마와 그 과정 속에서 살펴지는 생명체들의 경이로운 움직임들, 개체들과 종들 간의 먹이사슬 관계 등에서 생명의 보고(寶庫)와 생존 경쟁의 정글 같은 말들을 동시에 떠 올릴 수 있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때로는 바람에 너울이 일고 풍랑이 생기고 또 파도가 칠지라도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심을 잃지 않는 저 바닷물과 그 해수면은 모든 생명체들을 품어 안아주는 큰 팔이며, 끊임없는 자양분을 제공해 주는 젖줄이다. 그 수면 아래의 깊이를 모르는 곳에는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주는 바다 속의 나라가 펼쳐져 있다. 전설과 신화를 모두 동원한다 하여도 그 신비로움을 모두 밝혀주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용궁이나 인어들의 나라, 그 밖에도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죽음의 세계도 모두 바다와 결부돼 있다.

그래서 바다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적 함의를 한 마디의 말로는 결코 정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이 제시하는 이미지를 적절히 그려내는 또 다른 대용어(代用語)를 찾아내는 일도 또한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많은 화소(話素)들을 품고 있는 거대한 괴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불변의 고유한 가치와 다양한 이미지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바다는 한 번도 같은 모습을 되풀이해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그 천변만화의 외양을 규정하기는 무척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포착하기 어려운 변덕의 대명사는 더더욱 아니다.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일렁거림을 중국에서는 ‘파(波)’와 ‘도(濤)’라는 글로써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물의 결’, 즉 물의 끊임없이 일렁이는 속성과 결부 지은 것이다. 물에는 결이 있으며, 그것이 균질한 상태를 유지할 때, 사람들은 그것의 표면적인 규칙성에서 고요와 너그러움 등 또 다른 차원의 서정적 이미지를 얻기도 했다. 물론 그 반대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 있는 염소에서부터 온갖 종류의 미네랄 등은 갖가지 생명체들이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가장 미미한 원생 동식물에서부터 고래로 대표되는 고등 동물에 이르기까지 각종 바다 생명체들이 그 속에 모여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바다가 내포하고 있는 이미지는 그것의 겉모양만큼이나 다양하다.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생명원이다. 그것은 태초의 바다, 물에서부터 파생하는 이미지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수생동식물의 대부분이 이 가운데 들어 있다. 무한의 바다 가운데 군락지를 이루고 서식하는 산호초와 바닷말 등을 비롯해 해파리, 동식물성 플랑크톤, 크릴, 크고 작은 물고기 떼, 갑각류, 양서류, 그리고 보다 고등한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식물들이 있다. 또 바다를 터전으로 삼는 갈매기와 신천옹 그리고 펭귄 등의 조류들도 바다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 이들 바다와 관련된 생명체들에 관한 다양한 정보와 그것들이 서식하는 환경 등을 오늘날의 우리들은 각종 다큐멘터리 필름들을 통해서 엿볼 수 있으며, 이로써 바다가 갖는 넉넉한 포용성의 이미지도 동시에 짚어낼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는 바다의 또 다른 이미지는 원초적 약동이다. 바다의 겉모습에서부터 그 속에서 자라는 가장 연약한 개체들 그리고 그것들 보다 더 상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생명체들의 쉴 새 없는 움직임과 그러면서도 개체들이 보여주는 현란한 몸짓이나 같은 종류 간의 군서, 그 거대한 무리들의 집단적인 공간 이동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수많은 에피소드, 이들을 통해 자정, 자양분, 자가 생산, 번성 그리고 소멸 등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체들의 원초적인 약동의 이미지를 살펴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바다는 어부들을 비롯한 사람에게 그야말로 생을 영위하는데 더 없이 귀중한 화수분이었다. 그 속에서 서식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었다. 갖가지 식량원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므로 바다는 곧 안정된 미래를 보장해주는 신뢰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또한 바다는 사람들에게 더 넓고 무한한 세계가 펼쳐져 있음과 그 세계는 보다 더 풍요로운 세상과 관련돼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모험심을 자극하여 주었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꿈을 갖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두려움이자 동시에 도전이었으며, 그것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차원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바다에서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이미지를 이끌어냈다. 하나는 긍정적인 이미지이며,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것이다. 그 중의 전자는 바다로부터 얻어지는 실질적인 도움과 직결되어 있으며, 후자는 바다의 크고 심원함, 낯섦 그리고 돌발적 변화 등과 관련된 것이다. 바다가 지닌 이와 같은 양면성으로 인하여 그것은 늘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화로운 바다는 원하는 만큼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지만, 성난 바다는 사람과 그들의 주거를 포함한 생활의 터전을 모두 쑥대밭으로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바다는 희망이자 동시에 절망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런 바다를 인간은 끊임없이 관찰했으며, 보다 안전하게 그곳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고, 또 그 방법과 길을 탐색하였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배를 만들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다를 위무할 방법을 동시에 강구해야 했다. 바다를 관장하는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제도와 장치들을 마련했다. 그 속에 서식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은 하나 같이 사람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다는 진정한 화수분, 다함이 없는 인류의 곳간이자 해방구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물질적 정신적 장치들을 고안했다.

울산 앞바다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울산 앞바다는 식량을 제공해주었던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그 속을 자맥질하며 떠다니던 고래 떼는 사람들을 안심시켜준 화수분이었다. 사람들은 그 고래들의 바다를 기억했으며, 그 풍요로움을 지속적으로 향유하기 위하여 갖가지 장치들을 고안하였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바다 신과의 소통이었으며, 이를 위해 풍어제를 거행했다.

사람들은 바다와 관련한 각종 금기를 만들었고, 그에 따라 바다는 물론이고 스스로를 정화시켰다. 식량원이던 그 바다는 오래전에 생활원의 바다로 뒤바뀌었다. 먹거리를 제공하여 주었던 바다는 이제 감성적인 풍요와 그 밖의 무진장한 천연자원 그리고 소통의 창구로서의 바닷길 등의 개념들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 즉 ‘블루오션(Blue Ocean )’으로 재조명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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