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의 노르웨이
1988년의 노르웨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8.1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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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신문의 한 칼럼에서, 어른들의 소설·잡지에서, 전차에 버려진 인쇄물에서, 그것도 앞뒤가 잘려나간 글 한 토막을 읽고 감명을 받아 문득문득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그 내용은 어떤 형태로든지 지금까지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꿔 말하면 필자의 가치관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들이다. 그것들은 남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으뜸을 차지하고, 직장에서 일하는 자세에 관한 지침이 다음이고, 친구간의 변하지 않는 우정(友情)의 아름다움이 맨 끝이 된다. 나머지는 변덕을 부리며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들이다.

남녀의 사랑은 방인근(方仁根)의 소설 ‘동방춘(東方春)’을 중학 시절에 읽으며 싸가지 없이 눈치를 챘다. 포옹(抱擁)의 말뜻을 몰라 생전 처음 국어사전을 이용하여 찾아보고 손발이 저렸다. 지금도 포옹이라는 낱말은 발음부터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남녀가 끌어안고 있는 장면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전차에서 읽은 유명한 학자의 말, ‘직장에서 일할 때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직장도 아닌 가정교사로 남의 돈을 받을 때부터 책임감(?)과 성실성(?)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하였다. 성실한 가정교사(?)였는지 부잣집의 데릴 사위가 될 뻔도 했다.

중학교 시절,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우정을 읽고 나도 이렇게 친구를 사귀어야지 했던 다짐이 60년 가까이 된다. 사실, 자랑스럽게도 이 우정이 ‘울산제일일보’의 제자(題字)까지 연결되었다. 양승춘(서울대 미대 명예교수)이 필자를 위해 디자인료도 받지 않고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주었다.

이야기 거리로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따를 것이 없다. 조금 짜릿할 때도 있고, 긴장감으로 장면을 끌고 나가기에 같은 내용을 두 세 번 들어도 재미있다. 오늘 이야기는 ‘주홍 글씨’ ‘소나기’ 같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1988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목격한 수컷들의 싸움이야기이다. 노르웨이를 복지국가, 백성들이 서로 신뢰하는 국가, 모두가 착해 보이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쯤으로 알고 있는데, 필자가 1988년 주택가에서 전차를 기다리며 목격한 이 싸움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수캐들의 싸움’이었다.

오슬로에서는 전차를 타도 표를 받지 않는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세금으로 이미 공제되고 있었다. 외국 사람은 어느 사무실(?)에 가서 일정액을 내고 일정 기간 동안 무제한으로 타고 다니는 것이다. 무임승차했다가 걸리면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회의 참석차 일주일 정도 체류할 계획이어서 본의 아닌 무임승차를 하고 다녔는데 한 번도 검사 받지 않았다. 그렇게 번화하지 않은 주택가 뒷골목에서 바이킹 해적 같은 갈색 털의 두 사나이가 싸움을 하고 있었다. 키도 나보다 한자쯤은 크고 체격 자체가 엄청나서 싸움을 말리러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남의 싸움 구경은 재미있어서 보고만 있었다. 덩치가 좀 더 커 보이는 사나이가 작은 사나이를 쓰러트리고 때리는데 어디서 갑자기 금발의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나타나 싸움을 말리는 것이었다. 이때다고 생각하여 내가 싸움을 말리려 하는데 회의에 같이 참여하고 있는 노르웨이 사람이 나를 붙잡았다. 그러고서 저들의 싸움은 ‘삼각관계’ 싸움이니 끼어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말로는 여자가 알코올에 중독된 것 같고, 아래에 깔려서 맞고 있는 사람의 여자를 키 큰 사람이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시비가 붙은 것 같다고 하였다. 코피가 흐르며 일어나는 사람도 술에 취했는지 비틀 거렸다. 키 큰 사나이도 약간은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보아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여자의 만류로 싸움은 멈추고 키 큰 사나이는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골목길로 사라져가고, 작은 남자는 어느 집의 담벼락에 기대며 덜썩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주먹 쥔 왼손은 그들의 뒤를 향하고 흔들며 무슨 발악을 하는 것 같았다.

오후 3시경에 있었던 일이다. 복지국가(福祉國家)의 이면에 가려져 있는 이런 무기력증(無氣力症)을 보았는데 세월이 지나며 잊고 있었다. 이것을 정신병자 브레이비크가 슬프게도 다시 확인 시켜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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