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대국(大國)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직도 대국(大國)이라고 생각하는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7.2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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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10월13일부터 이듬해 2월27일까지 북경에 머물렀던 죽천 이덕형이 쓴 ‘죽천행록’을 보면 조선 사신들의 참담한 모습이 나온다.

반정(1623년)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능양군(인조)은 그 때까지도 후금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즉위 이후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편 인조를 ‘길들이기’위해 후금은 왕위계승권을 승인하지 않고 차일피일 하던 차였다. 이런 와중에 승인을 받기위해 죽천 일행이 북경에 갔으니 중국 관리들이 만나 줄 리가 만무했을 것이다.

북경에 도착한지 보름이나 지났지만 후금 황제에게 연통을 놔 줄 대신을 찾지 못해 이덕형은 매일 아침마다 자금성 남쪽에 있는 오문(午門)에 엎드려 입궐하는 대신들을 붙들고 황제를 배알케 해달라고 통 사정을 했다. “공(公)이 길가에 엎드려 손을 모아 비비자 ‘조선에 충신이 있다’며 ‘내일 도찰원으로 오라’고 했다. 공이 무수히 사례하고 회동관에 돌아와 파루를 기다리며 마을 밖에서 대령하니 춥기가 우리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죽천행록에 당시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12월에 접어들면 영하 30도를 기록하는 북경 추위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고관을 만나게 됐으나 다시 쫓겨날 위기에 처하는 장면도 나온다. ‘길들이기’에 나선 어느 대신이 느닷없이 트집을 잡으며 “변방 작은 나라 신하가 감히 우리의 위엄을 무시하려 드느냐. 내 쫓고 문 닫으라”며 이덕형을 발로 차며 내 쫓자 섬돌에 머리를 찧은 죽천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섬돌을 붙들고 밀려 나오지 않으려고 울부짖는 장면도 나온다.

그렇게 조선을 자신들의 속방(屬邦)으로 여겼던 청나라에 대해 조선인들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청국인을 ‘대국(大國)놈’이라 비하해 불렀다. ‘대국놈’은 그후 격음화현상을 겪으면서 ‘떼국놈’이 됐고 다시 ‘국’자를 탈락시킨 ‘떼놈’으로 불리다가 발음상 더 된 소리인 ‘뙤놈’으로 바뀌게 됐다.

중국인들의 이런 대국(大國)의식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특히 19세기 말 서구 열강들이 한반도를 넘보기 시작하자 종주권에 위협을 느낀 중국은 조선왕조에 가혹할 만큼 심한 핍박을 가했다. 1884년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청군을 동원해 난을 수습한 원세개는 칼을 차고 고종의 숙소에 들락거리는가 하면 이를 규탄하는 조선 대신들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중국인들의 대(對)조선 종주권은 청국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해 공식적으로 일단락 됐다. 1895년 일본과 맺은 하관(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하면서 부터다. 당시 대국(大國)을 자처하던 중국이 소국(小國) 일본에게 허무하게 패하자 구미 열강들은 그 때부터 중국을 ‘속빈 강정’으로 여겼다. 그리고 갈기갈기 물어뜯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의 대국(大國)의식은 그대로 계속됐던 모양이다. 지난 2005년 우리 정부가 중국정부에 수도(首都) 명칭을 ‘한성(漢城)’ 대신 ‘서울’로 변경해 줄 것을 요청하자 중국인들이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중국은 그 때까지도 서울을 한성(漢城)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들이 하관조약 이후 110년이 지난 시점까지 서울을 구태여 한성이라고 부른 데는 중화주의 사상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중국 왕조 행정편제상 성(城)은 황제가 임명한 제후가 거주하는 곳이다. 따라서 한국을 아직도 자신들의 제후(諸侯)국으로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중국을 방문한 김관진 국방부 장관 앞에서 진병덕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 약 15분 동안 미국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총참모장이라면 우리 군의 합참의장에 해당된다. 국방부 장관보다 한 단계 아래 직위인 총참모장이 김 장관 면전에서 외교적 결례를 범한 것이다. 이 보다 며칠 전 마이클 멀린 미 합참의장에게 당한 냉대를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이 미국을 비난했다. 자신이 마치 갑신정변 당시 원세개 쯤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에 이어 터진 1894년 청일전쟁 당시도 중국은 ‘속 빈 강정’이 문제였다. 일본군보다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대국(大國)은 큰 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한방에 무너졌다. 진병덕 총참모장이 인민해방군 숫자에 자신감을 얻어 허풍을 떨었다면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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