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공간엔 이질적 존재가 넘지못할 경계가 있다
모든 공간엔 이질적 존재가 넘지못할 경계가 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6.1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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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도 양 풀뜯는 곳·그러지 못하는 곳이 구분
강변바위도 수면·수면위 경계지점에 그림 새겨
1994년 9월의 일이었다. 당시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고고학연구실에서 바위그림을 연구하던 나는, 1993~1994년 사이의 두 여름을 고비 알타이 아이막(행정당위 ‘도’에 해당) 할리운 솜(행정단위 ‘군’ 또는 ‘읍’에 해당) 소재 ‘하난 하드’ 암각화를 발견하고 또 그것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그해 9월에 멀리 서쪽 끝의 호브드 아이막에서 갈단 보시크트 왕 탄생 35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 초청을 받아 그동안 조사했던 하난하드 암각화에 관해 발표를 했다. 당시 역사연구소의 소장이던 오치르 박사와 고고학연구실에서 바위그림을 강의해 주신 D.체벤도르지 현재의 고고학연구소 소장 등은 호브드 아이막 방문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셨다.

호브드 아이막 만항 솜의 ‘이쉬긴 톨고이’와 ‘호이트 쳉헤르 동굴’, 그리고 호브드 시 외곽의 ‘찬드만 하르 우주르’, ‘바타르 하이르항’, 에르뎅 부렝 솜의 ‘조스틴 하드’ 등의 선사 및 고대 암각화와 동굴벽화 유적지들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이쉬긴 톨고이 암각화와 호이트 쳉헤르 동굴 벽화 등은 그 제작 시기가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답사해 보고 싶은 유적으로 분류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갈단 보시크트 왕 탄생 350주년 기념 학술회의는 이들 유적지들을 답사할 수 있는 기회를 앞당겨 주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오치르 소장께 현지에 남아 유적지 몇 곳을 더 조사하고 가겠다고 했더니, 그는 친절히 비행기 표를 교체해 주었고 또 숙소 그리고 현장 답사 시 타고 다닐 차량 등을 마련해 주셨다.

이쉬긴 톨고이와 호이트 쳉헤르 동굴 등 두 유적지의 조사를 마치고 호브드 시로 돌아가던 도중에 목동 한 명과 만났는데, 그는 스스로를 하늘 아래 첫 번째의 목동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집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의 방목지는 해발 4천m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그날은 9월 7일경이었다.

산 정상 바로 아래의 편평한 곳에 두 채의 유목민 천막집 ‘게르’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를 초대한 목동의 집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그의 어머니의 집이었다. 오후의 마지막 햇볕이 긴 그림자를 남기는 시각이었는데, 산 정상에는 흰 눈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만년설이라서 나는 그 신비로움에 넋을 잃고 슬라이드와 비디오카메라로 눈 쌓인 풍광을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유목민의 게르와 산 정상 사이의 약간 비탈진 산등성이를 오르면서, 풀을 뜯는 양 떼를 보았는데, 양들이 일정한 높이 이상을 오르지 않는 점을 살피게 되었다. 분명히 바로 위에는 풀들이 길고 또 촘촘히 나 있었으나 양들은 그 풀을 뜯어 먹지 않았으며 또 풀이 많이 자란 위쪽으로는 오르지도 않았다. 울타리와 같은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양들은 일정한 높이 이상은 오르지 않았고, 아래에 난 풀들만 뜯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아래쪽의 풀들은 위보다 훨씬 짧았고 또 드문드문 나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2007년 여름에 나는 하카시야의 서북쪽에 있는 페치쉐 강변의 암각화를 조사하게 되었다. 그 해에는 지난해부터 시작하였던 술렉크 암각화의 형상들을 채록했었다. 술렉크의 채록을 모두 마친 후, 나는 인근의 우스틴 키노 마을에 들어가서 현지 주민들에게 일대의 선사 시대 바위그림 유적에 관한 정보를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현지 초등학교 교사는 술렉크의 맞은 편 산 살라비요프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하였다. 나는 그 선생으로부터 들은 대로 살라비요프 암각화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그 선생은 살라비요프 산의 두 번째 암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하였다.

넓은 스텝의 이곳저곳에서는 건초용 풀베기가 한창이었고, 평지로부터 약간 위의 산기슭에는 사람의 키만큼이나 높이 풀이 자라 있었다. 그런데 가축들은 절대로 그 지점을 통과해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곳의 어디에도 철조망이라든가 울타리 같은 장애물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바로 그 지점이 가축이 풀을 뜯을 수 있는 한계점이었으며, 그 너머는 야생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키만큼 자란 풀밭은 가축과 야생 동물 사이의 완충지대인 셈이었다. 그 지점을 넘어서면, 인간과 가축 등의 세속적인 공간이 아니라 산양이나 사슴 등이 사는 야생의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몽골이나 시베리아 등지의 여행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지역의 산들은 동남쪽에는 나무 대신에 풀이 자라고 있고, 서북쪽에는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날 나는 두 번째 암맥을 차례로 살피고 또 뒤졌지만, 암각화는 찾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산 전체를 뒤졌지만, 결국은 그것마저도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되돌아 나오다 숲과 민둥산의 두 부분이 만나는 경계지점에서 커다란 바위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물론 그곳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숲과 민둥산 부분이 만나는 그 지점의 저 아래쪽에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날 모든 공간이 똑 같이 서로 균질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새롭게 그리고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냥 평범하게 보이는 초원이나 산등성이 등에도 가축과 야생동물이 사는 공간은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두 세계 사이에는 완충지대가 있었으며, 그 지점을 경계로 양쪽에는 서로 이질적인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숲과 민둥산의 사이에 있는 바위는 그곳이 이쪽과 저쪽의 경계지점임을 천 마디 말보다도 더 강렬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그리고 2003년도에 아네가 호안의 베소프 노스 암각화 유적지를 조사하면서, 유적지와 관련한 나의 그와 같은 산발적인 경험들로부터 경계 지점이 입지 선정의 중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였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유적지는 아네가 호수의 수면과 맞닿아 있는 바위들에 주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여러 가지 제재들 중에서 백조는 물과 맞닿은 지점에 주로 그려져 있었는데, 그런 까닭에 형상들은 밀려오는 물결에 자맥질하였다가 물이 빠지면 떠오르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수면과 수면 위로 드러난 바위의 경계지점에 그림을 새겨져 있었는데, 조사를 하면서 겪어야 했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바위표면은 미끄러웠고, 물속의 바위에 서서 사진을 찍는 일은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물에 끊임없이 잠겼다 드러나는 형상들을 채록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이 유적지 조사를 하면서 겪었던 고심참담한 일들은 다른 기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이 렇듯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은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던 간에 모두가 동질의 조건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살펴지는 이절적인 요소들은 특별한 공간을 선정하는 데 중요한 판단의 준거가 되었음을 상기의 몇몇 사례들이 증거 해 주고 있다. 세계 각지에 분포하고 있는 바위그림 유적지들도 그와 같은 특별한 요건을 갖춘 공간 가운데 주로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 가운데 또 하나가 경계 지점이었으며, 그곳에서는 서로 이질적인 존재들이 모여 소통을 꾀하는 시도들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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