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각화 참 모습 보려면 빛이 쪼이는 고유시간이 있다
암각화 참 모습 보려면 빛이 쪼이는 고유시간이 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6.12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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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세이 강변에는 백야의 석양에 나타나고
톰 강변은 물결에 반사된 빛 바위면 비출때
선사인 선택한 ‘빛의 시간’ 알아야 판독돼
1 879년 11월, 알타미라 동굴 속 퇴적층을 발굴하던 마르셀리노 드 사우투올라(1831~1888) 후작은, 당시 다섯 살이던 어린 딸 마리아가 동굴 속을 노닐다가 급하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소리가 난 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마리아는 벽을 가리키며 연신 ‘소’가 있다고 소리쳤다. 후작은 마리아가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하였으나, 어린 딸은 등불에 비치어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낸 들소 떼를 똑 바로 가리켰다. 그것은 이미 그 지역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된 들소 ‘바이슨’의 그림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만년도 더 오랜 세월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들소 떼는 마리아가 든 등불의 불빛을 받아서 우리들 앞에 그렇게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선사 시대의 그림들은, 그것이 동굴 속이건 혹은 한데 바위그늘이건 간에 빛과 어둠의 교체에 의해, 홍수를 비롯한 물의 들고 남에 따라 그리고 사냥꾼의 모의사냥 의례 과정에서 죽었다가 살고 살았다가 죽기를 되풀이한다. 이 가운데서도 빛살과 홍수 등은 유적지의 선정에 큰 역할을 하는 점을 각지의 사례들을 통해서 살필 수 있다. 알타미라 동굴의 예에서 확인하였듯이, 어둠은 그림 속의 형상들을 잠들게 하였지만, 적당한 거리와 각도에서 빛이 비치면 그 형상들 하나하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어나 질주를 하거나 서로 힘을 겨루기도 하는 등의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어둠 속에서는 모닥불이나 등불의 불빛에 그 동물들이 되살아났지만, 바위그림처럼 열린 공간 속의 형상들은 뜨고 지는 태양의 빛에 의해 그림이 살아났다가 다시 죽기를 되풀이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침 햇살의 첫 빛이 비치는 곳을 신성시하였으며, 그와 같은 곳을 선정해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1905년에 프로베니우스(Leo Frobenius)가 아프리카의 콩고 고원을 여행하면서 남긴 피그미족 사냥꾼들의 사냥 의례에 관한 기록은 빛의 의미를 되살피는 데 매우 좋은 자료이다. 그에 따르면 피그미족 사냥꾼들은 아침에 가장 먼저 햇볕이 드는 곳의 땅을 골라 사냥감인 영양을 그린 후, 다음날 아침에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가 햇살의 첫 빛이 그 형상에 비칠 때 준비한 화살로 그 영양을 쏘아서 모의사냥을 하였다는 것이다.

바 위그림 가운데도 빛과 관련된 유사한 사례들이 적지 않다. 애리조나주 튜바 시 근처의 암각화 유적지에서는, 아침 햇살 중에서도 첫 빛이 비치는 곳에 나선형과 십자형의 도상들이 그려져 있다. 미누신스크 분지의 쉬쉬카 암각화도 좋은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쉬쉬카는 예니세이 강변에 우뚝 솟은 산이다. 미누신스크의 브이스트라야 마을 동쪽의 약 50m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산의 동서남쪽 경사면에 분포하는 바위들에 각종 동물 형상들이 그려져 있다. 동남쪽에 분포하는 암각화들은 비록 경사가 급해도 형상을 채록하고 또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만, 서쪽은 겨우 사람이 설 정도의 자리만 있고 바로 아래는 몇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였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정말로 천신만고 끝에 그림을 채록했지만, 윤곽이 또렷한 사진을 촬영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조사 기간 중 여러 차례 사진 찍기를 시도하였지만, 그 어떤 사진도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사가 늦어져 밤 10시가 가까워질 무렵에 숙소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때 서북쪽에 솟아 있던 태양의 빛살이 서쪽의 그림이 있는 암면을 엇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그 순간 그동안 제대로 보이지 않던 형상들이 또렷이 모양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 암면의 그림은 백야의 여름날 늦은 저녁에만, 그 속에 어떤 형상들이 그려져 있는지 살필 수 있었던 것이다.

케 메레보의 톰 강변에 그려진 암각화를 조사하면서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톰 강변의 암각화는 2003년 여름에 조사를 하였다. 이 암각화는 일찍이 A. 오클라드니코프와 A. 마르티노프 등 저명한 연구자들에 의해서 세계 암각화 학계에 그 전모가 소개되었으며, 그 후 A. 마르티노프 박사는 이 유적지를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만들어 학술 연구는 물론이고 유적지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A. 마르티노프 박사는 희수(喜壽)를 넘긴 지금도 물론 이 암각화의 연구와 박물관 관리 그리고 찾아오는 탐방객들에게 선사미술의 진가를 알리는 일을 지속하고 있다.

나는 톰 강변의 암각화 답사 계획을 사전에 모스크바의 A. 데블레트 박사께 말씀드렸으며, 가능하면 현지에서 그동안 직접 뵌 적이 없었던 A.마르티노프 박사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뜻도 전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케메레보로 기차를 타고 갔으며, 역에 도착하자 A. 마르티노프 박사는 사람과 차량을 보내 주셨다. 케메레보 대학의 그의 연구실에 도착하였을 때 A. 마르티노프 박사는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그간에 저술한 자료들을 준비해 주셨다. 그리고 곧장 톰 강변의 암각화 유적지로 향하였는데 암각화 공원 내부에는 관리시설과 전시관이 만들어져 있었으며, 전시실에는 톰스카야 피사니차를 비롯한 각종 암각화 도면들과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A. 마르티노프 박사의 안내를 받으며, 톰 강변의 암각화를 답사하고, 이어서 며칠간 자유롭게 사진 촬영과 형상 채록 등 조사를 할 수 있었다.

하루는 오후 8시경 조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 A. 마르티노프 박사와 마주쳤는데, 그는 일체의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좀 더 현장에 머물면서 그림을 자세히 관찰해 보라고 하셨다. 이 암각화는 동쪽으로 향한 바위에 그려져 있었으며, 그림 중의 일부는 감실과 같은 바위그늘 아래에도 그려져 있었다. 바로 그 아래는 거대한 톰 강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흘러가도 있었다. 밤 9시가 되고 10시가 되면서 서쪽에 있던 태양의 빛살이 물결 위로 쏟아지자 갑자기 물결은 거대한 반사경이 되어 그 빛을 바위그늘을 향해 되비추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일렁이는 물결에 따라 빛살도 일렁거리면서 이전에 어디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나는 바위그림 유적지 가까이에 물이 있는 점을 몇 차례 지적한 바 있으며, 그것이 갖고 있는 성질과 역할 그리고 상징 의미 등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나는 이전에 어디에서도 본적이 없고 또 들은 적도 없는 색다른 물의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낮이라도 직접 빛이 닿지 않았던 바위그늘이 저녁 10시경에 물에 비친 빛의 반사광선을 받아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 감싸였던 것이다. 물이라고 하는 반사경에 의해 바위그늘 속은 기묘한 광경이 연출되었으며, 그 속의 형상들은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M. 데블레트 박사는 무구르 사르골 성소의 암각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그림은 성소의 중심에 있는 바위라고 하였다. M. 데블레트 박사에 의하면, 이 바위를 지역민들은 신성한 곳으로 인식하고 숭배를 한다고 한다. 그 바위의 윗부분에는 아이를 낳는 여성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아래에 굽 동물들이 그려져 있다고 하였다. 이 여성상을 두고, M. 데블레트 박사는 종족을 낳아 준 어머니의 모습을 그렇게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현지 주민들은 홍수가 져 강물이 불고 바위가 물속에 잠기면 이 상은 죽는 것이며, 다시 물이 빠지면서 바위가 드러나면 그에 따라서 그 형상은 부활한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홍수에 의해 이 암면 속의 형상들은 죽음과 부활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고 있는 셈이다.

레나 강변의 쉬쉬키노 바위그림을 조사하면서, L. 멜니코바 박사와 온갖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L. 멜니코바 박사는 이 그림을 10년 동안 조사한 결과, 어떤 그림은 봄날에, 또 어떤 그림들은 가을 날 오후에 잘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때가 아니면, 그곳에 어떤 형상이 있는 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L. 멜니코바 박사의 이 말은 그림이 계절과 시간 그리고 햇빛의 각도 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그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그 계절의 그 시간이 되면 그림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생생함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림들은 끊임없이 재생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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