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강·산을 성소로 삼아 세계관 표현
특이한 강·산을 성소로 삼아 세계관 표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5.2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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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은 죽음·산은 삶·하늘은 신성 3界로 대비
러시아·몽골지방 민담·전설 곳곳에 스며있어
반구대 암각화 공간 성스러운 요소 두루 갖춰
1996년 여름의 일이었다. 남부시베리아의 하카시야 공화국 비렉출에서 역시 바위그림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카스 족 사냥꾼 둘이 조사단의 야영지를 방문하였다. 그 중의 한 명은 저녁 식사 후, 내 곁으로 와서 하카스 족의 세계관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그에 의하면 하카스 족은 세계가 하늘과 땅 그리고 지하 등 세 개의 이질적인 공간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믿으며, 이 중의 하늘은 삶(생명), 지하는 죽음의 세계라고 하였다. 땅은 물론 사람과 동물들이 사는 세계이다. 그리고 하늘과 지하는 다시 아홉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층마다 신분이 다른 신들이 살고 있으며, 각각의 세계로 향해 올라가거나 내려갈수록 그 능력과 신분이 점점 높아지며, 최상과 최하층에는 최고의 신들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에 따르면, 하늘과 땅 가운데 솟아 있는 산에는 사람과 신들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타흐 에지’라고 하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중간 정도의 존재인 타흐 에지는 키가 약 3m 정도로 크며, 투시력이 있어서 장벽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고 또 땅에 발을 딛지 않고도 걸으며 날아다닐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마음대로 볼 수 없으나,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에는 예외적으로 그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 타흐 에지는 그 사람이 이전에 갖지 못했던 특별한 능력을 선물로 준다는 것이다. 또한 그 반수반인은 인간 세계의 여자들을 납치하여 아내로 삼는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하카스족의 타흐 에지는 몽골의 ‘알마스’와 여러 면에서 흡사하다. 몽골에는 알마스라고 하는 반신반인의 야생녀가 사냥꾼들의 민담과 전설 속에 등장한다. 둘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타흐 에지가 남성적 존재인데 비해 몽골의 알마스는 여성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알마스도 키가 3m정도이며, 깎지 않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또한 알마스도 인간 세계의 남자를 취하여 결혼을 하는데, 그럴 경우 그녀는 온갖 종류의 값비싼 모피를 남편과 그의 가족들에게 선물한다고 알려졌다. 물론 그녀가 모습을 보여줄 때에만 사람들은 그녀를 볼 수가 있다.

하카스 족과 몽골인들의 타흐 에지와 알마스를 통해서 살필 수 있듯이, 이들 둘은 산에 사는 반신반인적인 존재들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북방 수렵 및 유목민들이 이해하고 있는 세계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즉 하늘과 산과 땅 그리고 지하 등 뚜렷이 구분되는 상이한 세계가 있고, 그 속에는 우리와는 분명히 이질적인 존재들이 거주하고 있음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화 가운데서도 굳이 반신반인적인 존재를 찾아본다면, 산신이 되어 아사달로 들어간 단군도 같은 유형의 모티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산이란 원래 인간이나 신들의 세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산은 천상의 신들이 인간세계로 내려오는 곳이며, 인간이 그의 대리자를 통해 신과 소통을 꾀하는 곳이다.

이렇듯 신화 또는 민담의 형식으로 전해오는 각 종족들의 세계관이 조형 예술의 형식으로 표현된 경우도 있다. 좋은 예 가운데 하나로 오쿠네보 시대의 ‘이즈바야니에’를 들 수 있다. 남부시베리아의 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에는 기원전 3천년 경부터 아파나시에보라고 하는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후 이 지역에는 약 2천년 동안 청동기 시대가 지속되었는데, 오쿠네보, 안드로노보 그리고 카라수크 등의 문화들이 차례로 선 문화의 뒤를 잇는다. 인도 이란계와 몽골계 유목민들이 이 지역을 두고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이들 문화는 차례로 교체되었으며, 각 문화기별로 토기, 청동제 생활이기 그리고 매장풍습 등 서로 간의 독자성이 있는 문화를 창출해 놓았다.

이 가운데서 오쿠네보 문화는 예니세이의 지류 우이바트 강변의 오쿠네보 마을 근처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그 문화상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토기 그리고 선돌 형식의 거석기념물인 ‘이즈바야니에’ 등이 이 문화의 특징이며, 첫 번째 발굴지의 지명을 따서 ‘오쿠네보 문화’라고 명명하였다. 이 문화는 기원전 2,500년경에 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를 중심으로 하여 몽골계 유목민들이 남긴 것으로 밝혀졌다. 얼굴-마스크, 소, 맹수, 출산 장면 등은 이 시기에 제작된 바위그림의 중심적인 주제였으며, 물고기 등의 조각품과 뼈에 새긴 인물 선각 등도 이 문화의 독특한 조형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즈바야니에는 오쿠네보 문화인들이 그들의 세계관을 선돌 가운데 조형언어로써 집약시켜 놓은 것으로, 이 문화의 성격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표지적인 조형물이다. 이즈바야니에는 그 겉모습이 남성의 생식기를 상징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의 돌기둥 속에 삼계가 응축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세계의 중심축’ 역할을 한다. 이 돌기둥 속에는 그와 같은 구조에 걸맞게 세계를 창조한 주인의 얼굴 ‘리치나’가 그 가운데 형상화되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해와 달 그리고 각종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땅 속에 묻히는 부분에는 지하 세계를 상징하는 맹수가, 위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산양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또한 뒷면에는 우주 강이 사다리꼴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즈바야니에’라고 하는 하나의 선돌 형식의 조형물을 통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 전에 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에 거주하였던 오쿠네보인들의 세계관을 살펴볼 수 있었다. 오쿠네보 문화의 주체들이 세웠던 이즈바야니에는 그 자체가 삼계를 상징함과 동시에 얼굴이나 해와 달 그리고 동물 등으로 그 세 개의 서로 다른 공간의 성격을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세 개의 세계는 뒤편에 새겨진 우주 강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 오쿠네보인들은 세계의 창조주가 해나 달보다 훨씬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크고 또 정성스럽게 가운데에 그렸으며, 그 밖의 제재들은 그의 비중에 걸맞은 자리에 배치하였던 것이다.

산지 알타이의 철기시대에는 ‘파지리크’라고 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파지리크는 스키타이 시베리아 문화의 ‘산지 알타이식’ 변형이다. 이 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적석목곽분이며, 영구동토지대라고 하는 풍토적 특성 때문에 목곽 속의 시신은 관 속으로 스며든 물이 얼면서 완전히 냉동되고 만다. 1948년에 발굴된 파지리크 2호분 속에는 남녀 2인의 시신이 놓여 있었는데, 이들은 매장 전에 완전히 미이라화 된 것이다. 남자의 정강이에는 커다란 물고기와 산양들이, 가슴과 팔 그리고 어깨뼈 부분에는 새부리에 사슴뿔 그리고 몸통의 앞뒤가 180도 완전히 뒤꼬인 말이 서로 합성된 동물과 함께 꼬리가 긴 맹수 등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물론 물고기는 지하를 상징하며 새부리에 사슴의 뿔과 말의 몸통을 한 환상적인 동물은 하늘과 지상의 결합을 나타낸 것이며, 이로써 이 남자는 스스로 삼계를 통합한 우주적 존재를 구현한 것이다.

이처럼 몇 가지 예들을 통하여 신화와 조형 예술의 형식으로 표현된 타이가와 스텝 지역 수렵 및 유목민들의 우주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산이나 강 등 스스로 삼계를 구현하고 있는 자연 경관을 선사 및 고대인들은 우주산 또는 우주 강이라고 하여 신성시하였다. 사람들은 스스로 삼계를 갖추고 있는 그와 같은 공간들을 성소로 삼아서 그들의 세계 및 그 주인 그리고 각 구성원들을 바위그림의 형식으로 표현해 놓았음을 각지의 바위그림 유적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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