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夕陽)을 바라보며
석양(夕陽)을 바라보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5.19 21: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자 석양은 해가 지는 저녁때의 햇빛을 말한다. 조양(朝陽)은 아침에 뜨는 해를 말한다. 또한 남자의 건강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새벽에 조양도 되지 않는 X에게는 돈도 꾸어주지 말라는 뜻도 있다. 한 50여년 전만해도 우리는 조양보다 석양을 자주 보았다. 늦게까지 들판에서 농사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공기가 오염되지 않아서 붉게 물든 하늘을 아주 멀리까지 깨끗하게 볼 수 있었다. 가끔은 노랗게 물든 또는 파란 하늘이 반쯤 남아있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석양은 지는 해를 말하기 때문에 그토록 화려한 하늘의 색일지라도 혼자서 저녁노을, 석양을 볼 때면 우리는 숙연(肅然)해질 때가 있다.

인생을 하루로 비유할 때 석양은 노년의 다된 끝자락에 해당되는 것으로 말한다. 모두 타고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하루가 저무는 때를 말한다. 그러다보니까 사그라지는 모닥불 찌꺼기는 늙은이의 건 버섯으로 보기도 한다. 석양을 우리말로 바꾸면 저녁노을이 된다. 이 노을이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동산의 봉우리에 나타나면 아침노을이 찬란하게 빛난다고 표현한다. 바로 화려한 저녁노을과 찬란한 아침노을의 차이가 이렇게 나타난다. 그래서 청춘예찬(민태원)에서 청춘을 ‘희망의 노을’이 뜨는 때라고 말한다.

울산에서 석양을 감상할 만한 곳은 문수산 꼭대기가 제격이다. 문수산은 언양의 들판에서 보거나 태화강에서 보거나 어디서 보아도 아주 잘 생긴 모양을 갖고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울산으로 옮겨 놓고 동식물을 살게 한 것 같다. 문수산 정상의 산불감시초소에서 언양 쪽으로 조금 내려와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지산을 보면서 석양을 기다리면 문득 세상살이가 차분하게 정리되어진다.

첫째가 늙어서 욕심을 내면 안 된다는 차분한 마음이 새롭게 일어난다. 돋보기가 글과 말로 주장했지만 노욕(老慾)처럼 추잡스런 모습은 없다. 마치 소화도 못 시킬 갈비찜을 한 입 가득 물고서 허우적대는 늙은이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젊은 사람들에게 노욕을 갖고 있는 치매환자로 보이지 않는지 돌이켜본다.

둘째는 지금도 늦지 않다는 주장에서, 무엇을 하는데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하느냐를 확인한다.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운동을 다시 시작할 것인가, 그동안 덕을 보았던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고마움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 아닌가, 일본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지진피해지역을 찾아볼 것인가, 결과 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면 무슨 책을 더 읽어야 할 것인가 등등 너무 많아진다.

셋째는 유행가 ‘노을’의 주인공이 되어 애조 띤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열여섯 어렸을 때를 떠올린다. 그때의 ‘딸고만이’(딸을 그만 낳으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가 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을 때의 모습이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그냥 선채로 붙잡지도 못하고 그냥 선채로 당신은 노을 속에 멀어만 가니……가지마세요. 나를 두고 가지마세요. 아∼아∼ 노을 지는 들녘 길에서 어쩔 줄 몰라 그냥 웁니다. 둘 일 적엔 노을빛도 내 마음 같더니 이제 보니 노을빛은 눈물에 가려 나만 혼자 들녘 길에 울고 섰으니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네…’ 딸고만이도 지금쯤 저 석양을 보고 있지나 않은지 글썽이는 눈물을 훔치며 스스로 화들짝 놀란다.

오래 전에 가족들을 모아놓고 남겨놓았던 말, ‘내가 죽으면 내 몸을 울산대학교 의과대학에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하라’는 말이다. 지금 이 육신이 내 몸이 아니라는 현재를 다시 확인 하고 나니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 든다. 내가 무엇인데 그들이 나에게 그렇게 많이 베풀어주었을까를 생각하다가 나온 결론이다.

나는 지금도 박완서님의 ‘나의 삶, 나의 문학: 왜 사냐고 물으면…’에 나오는 다음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죽는 것은 몸 일뿐 사후세계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이 그 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다…육신이 없는 대오각성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현재가 중요한 것이다.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