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고래잡이 기원 밝힐 세계적 유물
한반도 고래잡이 기원 밝힐 세계적 유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5.08 18: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년 8월 울산 남구 황성동 처용암 앞 도로공사중 발견
대곡리 암각화 속 작살과는 달리 탄알에 가까운 모습
선사인 도구 제작·포경기술 풀어낼 6천년 된 블랙박스
작살이 박혀 있는 고래의 어깨뼈와 등뼈가 출토되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8천년 전에서 6천년 전 사이로 추정되는 유적지에서. 이 소식은 울산 발로 지난해 8월에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정말로 의외의 발견이고 또 그와 같은 사실을 살피게 하는 유물이 남아 있다는 것이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하고 스스로에게 반문까지 해 본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제작 시기의 상한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도 모르는 대곡리 암각화 속에 작살을 들고 고래를 잡는 작살자비들과 또 고래 등에 작살이 각각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는 것은 곧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이루어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실증시켜 주는 고래잡이와 관련된 유물들이 발굴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뜻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살이 꽂힌 고래 뼈의 발견은 작살과 고래와 사람 그리고 그것의 사용방법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지니는 의미가 실로 크고도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놀라운 소식의 진원지는 다름이 아니라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처용암 앞이라 한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한국문물연구원이 처용암 앞의 울산신항만 부두 연결도로 개설공사 현장을 발굴하던 중에 다량의 고래 뼈들을 발굴하게 되었고, 그것들을 약품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등뼈와 어깨뼈에 각각 사슴 앞다리 뼈를 갈아서 만든 작살이 꽂혀 있음을 확인하였다는 것이다.

고래 뼈들이 발견된 곳은 해발 -2m의 지표 속이며, 신석기 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들이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토기들의 제작 년대는 지금으로부터 8천년 전에서 6천년 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 유적지 발굴조사단의 책임연구자에 따르면, 이미 8천 년 전부터 작살을 이용한 의도적인 고래잡이가 이루어졌으며, 이로써 포경의 역사가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자료들이 반구대 암각화 속 고래잡이 장면의 실증적인 자료가 되는 점도 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고래의 뼈 속에 박혀 있는 두 개의 작살! 한반도 포경사의 시원을 더듬는 데 이 보다 더 결정적인 증거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야말로 작살 포경의 구체적인 상황을 밝힐 수 있는 또 하나의 완벽한 증거를 우리는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아무리 낮추어 잡아도 지금으로부터 6천년 전에는 이미 고래의 뼈까지 뚫을 수 있는 정교하고도 또 강력한 작살 포경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한 셈이다. 그러므로 작살은 그동안 우리들이 지니고 있었던 포경에 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할 때 시간적으로는 수천 년도 더 전에 완성되었으며, 기술적으로는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한반도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첨단산업의 전반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작살은 줄이 매달린 작살 촉과 창대로 구성되어 있다. 작살을 이용한 고래잡이 방법은, 작살자비가 물 위로 떠오르는 고래를 향해 작살로 내려 찌르는 것이었다. 그러면 창끝에 매달려 있던 작살이 창과 분리되면서 고래의 몸통에 작살 촉이 박히게 되고, 이때 포수는 부구가 달린 줄을 풀어 주어 고래가 지쳐죽기를 기다리다 끌어 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포경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은 한반도의 동해안이나 일본 그리고 베링해협 등지에서 전통적으로 고래잡이를 하던 어로민 세계에서 살필 수 있는 방식이다. 물론 작살자비가 작살을 내리 꽂아서 잡던 방식은 나중에 포경선단이 대형으로 꾸려지고 또 작살포를 이용한 보다 전문화된 고래잡이로 바뀌었으나, 근본적으로 포경 방식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보도 내용을 보면, 작살은 사슴 앞다리 뼈를 갈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작살의 크기와 생김새 그리고 그 경도(硬度) 등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발표된 것이 없다. 그러나 살아있었을 고래의 껍질과 지방층, 그리고 살을 통과하고 다시 등뼈와 어깨뼈 속으로 작살이 뚫고 들어가 박혔을 정도라면 그 끝의 예리함과 경도, 그것을 내리꽂기 위한 힘의 세기 그리고 속도 등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등의 문제는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작살의 메커니즘이 그야말로 미스터리인 셈이다. 공개된 사진 속의 작살도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화살이나 미늘이 달린 작살이라기보다는 오늘날의 탄알에 더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였는지도 궁금한 사항이다.

그러니까 대곡리 암각화 속에 그려진 작살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비단 대곡리 암각화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고래잡이 그림들 속의 작살자비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작살자비는 작살을 들고 뱃머리에 고래를 향해 그것을 내리 꽂으려는 모습이다. 따라서 처용암에서 발견된 작살의 경우는, 사람이 그것을 들고 내리 꽂은 것인지 아니면 제3의 발사 장치가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발견된 작살 끝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은 어떤 공정을 거쳐서 작살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어느 정도의 예리함과 경도를 지니고 있었는지 등도 밝혀내어야 한다.

발굴 과정에서 수습된 뼈를 통해서 볼 때 포획된 고래는 수염고래의 일종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이로써 장생포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연안에서 서식하였던 고래의 종류와 더불어 주요 포획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가령 가정을 하여 포획한 고래가 흰긴수염고래라고 한다면 그것은 크기가 약 22m~33m 정도이며 몸무게는 125t~179t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와 같은 고래를 작살로 찔러서 잡았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좀 더 확대시키면, 그 고래를 잡기 위해서 꾸렸을 선단과 선원 그리고 포획 후 해체 장소까지 운반하는 일 그리고 해체와 분배 등이 후속조치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살이 꽂힌 고래 뼈 속에는 마치 블랙박스처럼 그러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아주 작은 뼈 조각 하나가, 바로 그와 같은 거대한 고래를 포획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것은 사슴 뼈에서 작살로 그 속성이 변절된 것이며, 가공할 공격용 무기가 되어 고래를 살해한 것이다. 작살의 미스터리는 앞으로 풀어내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선사 대곡리 사람들의 첨단 공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곡리 암각화를 남긴 원동력이었으며, 복원시켜야 할 선진 포경산업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