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자존감(自尊感)은 남에게 피해를 준다
지나친 자존감(自尊感)은 남에게 피해를 준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4.19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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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과 자존심(自尊心)은 그 뜻이 비슷하다. 단지 자존심이라고 했을 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존심이 상했다’는 말에서처럼, 동년배 친구 사이에서 상대방이 타고 난 나의 외모를 헐뜯거나, 최선을 다한 나의 능력을 깎아내리거나, 스스로 약점으로 여겨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꼬집었을 때, 내가 느끼는 심한 불쾌감이다.

이것이 악화되면 울화병(鬱火病)이 되기도 한다. 어느 나라에서나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한테 버릇없는 행동을 하면 늙은 사람이 힘으로 대척할 수 없으니 그냥 말로, ‘나, 젊어봤는데. 너, 늙어봤어?’라며 상대하지 말라고 충고를 한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15년도 넘게 어린 사람이 상사(上士)행세를 할 때, 당하는 사람은 혈압이 올라간다. 그리고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난다. 울화병이다.

비록 실제적인 상사라고 하여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줄 모르는 태도로 ‘당신 너무 뚱뚱하잖아! 체중부터 줄여!’라고 신경질을 부리면 아랫사람은 이만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일 굶어죽을지언정 못 참겠다고 사표를 던져버린다. 이런 말을 뱉어버린 상사는 지나친 자존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낸다. 객관적으로 보아 자기는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한 것도 없는데 지나친 자존감으로 저만 잘 났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 어설픈 운동권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남의 말이 통하지 않는 자존감이다.

정신건강에서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나이다’라고 자기를 수용하고 인정하며 자기의 존재가치를 믿는 자기존중의 마음이 기본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장인(匠人)들이 갖고 있는 마음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자존심이다. 이렇게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남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비교한 결과로 시샘까지 발동하여 남을 괴롭힌다. 심하게는 남의 가치관까지 나의 가치관과 비교하여 시비를 걸기도 한다.

문제는 자존감이 지나쳐서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자기집착에 빠져 괜한 이웃들까지 피해를 보게 하는 데에 있다. 크게는 나라의 정치판에서 ‘이 나라, 나 아니면 안 된다’와 작게는 조그만 직장에서 ‘이 회사,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과대망상까지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들이 누구냐고 은근히 비밀을 캐려는 사람이 있어도 여기서 말하면 안 된다. 명예훼손죄에 걸려 엄청난 위자료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재판을 받고서이다.

신문의 칼럼을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존감이 높다. 누가 인정해주건 말건 ‘나는 나이다’의 자존감으로 칼럼의 주제를 잡고, 그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진다. 최근의 한 예로 모 일간지의 이진녕 논설위원의 ‘지난 대선 때 누가 ‘신공항’ 알았나’에 잘 나타난다. 첫 문장부터 자존감의 표현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물어보고 싶다. 2007년 대통령선거 때 이명박 후보의 동남권 신공항 건설 공약을 알고 있었는지.…과문한 탓인지, 관심이 없어서인지 명색이 신문을 만드는 나도 솔직히 대선 당시엔 알지 못했다.’ 여기서 이진녕 논설위원이 어떤 독자를 머리에 상정하고 이런 표현을 했는지 알 수 없다. 특히 신문사의 어느 책임자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그런 소재를 택했느냐고 문제를 삼기나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자존감만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그는 솔직할 수 있었고, 칼럼에서 논리성과 객관성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필자도 그이 못 지 않게 솔직하고 싶다. 그리고 장인정신의 자존감을 가지려고 애를 쓴다. 필자는 칼럼을 쓸 때, 몇 사람 독자를 상정(想定)한다. 첫째는 창간호부터 이 칼럼을 읽어주는 사람이 옆에 앉아 있다 상정하고 그 사람에게 이야기 하듯이 쓴다. 꼭 ‘재미있습니까?’를 묻는다. 다음은 직명조차 밝힐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읽어주기 때문이다. 끝으로 지나친 자존감(나 아니면 안 돼!)으로 내 칼럼에서 트집만 잡으려드는 무리를 떠올린다. 이진녕 논설위원도 이런 무리를 상정하고 글을 쓰는지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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