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청와대 수석비서관 시절(9) - 프로야구, 산고를 겪었다
《제94화》 청와대 수석비서관 시절(9) - 프로야구, 산고를 겪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4.17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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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3년 후에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기로 하고 그때까지는 서울의 고등학교 선수자원의 3분의1을 우리에게 배정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우리도 여기서 빠지겠습니다.’

그들은 미국의 대도시 뉴욕을 예로 들었다. 한 도시에 양키즈와 멧쯔의 두 팀이 있으면서 잘 운영되고 있다는 증거를 대었다. 나도 이점은 잘 알고 있었다.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제안이었다.

이 점을 MBC의 이진희 사장과 협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MBC는 나의 구상과는 별도로 프로야구 창단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MBC는 창사 2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80년에 이미 프로야구단을 창설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나의 구상과 같은 전국에 몇 개의 구단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수 선수만으로 된, 축구의 ‘할렐루야’ 같은 성격을 갖는 1개의 팀으로 우선 프로야구의 싹을 틔운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MBC는 프로야구의 우선권을 주장했고, 서울지역을 고집하여 제1안으로 MBC가 서울연고 팀으로 되어있었다.

나의 협상을 이진희 사장은 강하게 거부하였다. 때로는 나도 화가 나면 목소리가 커지며 전화로 말을 하다가도 그만 전화기를 내려놓아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 그 때가 처음인 것 같다. 한참을 설득하면서 전국적 차원에서 MBC가 고려해주셔야겠다는 사정을 여러 번 얘기하는데도 이 사장은 막무가내였다. 나는 문득 머리로 프로 야구 창단이 여기에서 무산되고 마는 구나의 절망이 덮쳐왔다.

‘다음 월요일까지 결론을 내어 연락이 없으면 지금까지의 모든 준비는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모두 깨버리겠습니다.’며 전화기를 내려놓아버렸다.

MBC에서 어떤 진통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월요일 오후 3시경에 청와대로 전화가 왔다. ‘MBC가 양보를 하기로 했습니다.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처음 ‘한국프로야구 창립계획서’를 검토한 뒤 나는 이호헌씨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이만큼의 계획서면 충분하니 프로야구를 할 만한 기업을 물색하라고 하면서 신신당부한 말이 있었다. ‘강요는 안 됩니다.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진희 사장은 MBC 구단의 구단주(球團主)도 하고, 프로야구 조직이 만들어지면 총재(커미셔너)도 하겠다고 이호헌씨에게 적극적이었다. 이 때문에 그 뒤로도 여러 프로구단의 연고회사를 정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었다. 이때의 경험이 훗날 총장이 되어 지역사회 현안문제, 학생들과의 민주화 투쟁의 지도 문제에서 타협점을 찾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옛날 정신문화 연구원 설립과정보다 더 힘든 조정 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1982년 3월 27일 서울 동대문에서 개막전을 가졌다.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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