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에 찍힌 그물흔적 고대 어로활동 방식·시기 알려줘
토기에 찍힌 그물흔적 고대 어로활동 방식·시기 알려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4.17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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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2차 부산 동삼동 패총 문화재 조사중 발굴
신석기시대 그물이용 고기잡이한 사실 입증 자료
대곡리 암각화 그물-고래 결부 연구자료로 활용
동삼동 패총은 한반도의 남부지역에 거주하였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삶의 많은 부분을 복원할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유적이다. 이 유적이 주목을 끈 것은 이미 일제 시대였지만, 그 후 실시된 몇 차례의 발굴 조사 및 출토품 정리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주거지와 옹관묘, 토기, 석기, 골각기, 조개 팔찌, 각종 장신구 등은 신석기시대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 등을 살피고 또 복원하는 데 더 없이 귀중한 자료들이다. 또한, 이 유적지의 조사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원양어업을 하였음과 더불어 바다 건너 일본과의 교역에 관해서도 신뢰할만한 자료들을 획득한 것으로 밝혀졌다.

발굴된 유물 가운데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토기 파편들이다. 그런데 토기는 흙의 속성을 인위적으로 변성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 파편 하나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의 생업과 각종 기술력, 종교관 그리고 미감 등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태토의 채취, 그릇을 빚고 또 굽는 방식, 나아가 생활과 주요 생계 수단, 분업화의 정도 등을 파악해 내는 것은 물론이고, 또 그릇 표면에 시문된 무늬로써 당시 사람들의 관심 사항과 주조적인 무늬 그리고 그 조형 양식 등도 읽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소성이 가능한 상태의 흙으로 빚는 까닭에 때로는 원했건 혹은 원치 않았건 간에 당시 제작 집단 및 그들의 생활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그 속에 마치 날인된 지문처럼 남아 있게 된다.

그것들 가운데 주목을 끄는 것 중 하나가 그물이 찍힌 토기 파편(사진)이다. 이 파편은 1970년 2차 조사 때 국립중앙박물관이 동삼동 패총 북쪽 끝 구역을 발굴하던 과정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크기는 7.2cm 정도이다.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이 파편은 제2문화층에서 발굴되었으며, 그 제작 시기는 신석기 중엽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물 자국은 그릇의 입술아래쪽 2.5cm 지점에 뚜렷이 찍혀 있다. 남아있는 자국을 통해서 볼 때 그물을 짠 망사는 두께 1mm 전후의 실을 꼬아서 만들었으며, 그물코의 크기는 약 1.8cm~2,7mm정도임을 알 수 있다. 그물이 그릇 전체를 둘러싸고 찍혀있었는지 아닌지 그리고 실의 재질이 무엇인지 등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작은 파편이지만, 그물의 모양과 그물코의 크기 그리고 제작 방식 등을 살피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 그림을 통해서 이와 유사한 그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유기물로 제작된 신석기 시대의 생활이기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런 까닭에 그동안의 발굴 과정에서는 방추차나 뼈바늘 그리고 그물추(사진) 등 부식의 위험이 낮은 것들만 수습되었으며, 이들을 통해서 각종 생활이기가 실제로 제작되었음을 짐작하였던 것이다. 비록 거칠고 또 조야한 것일지라도 실을 잣아 옷감을 짰음을 출토된 방추로써 추정할 수 있었, 바늘을 통하여 옷을 만들어 입는 등 바느질을 하였음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그물추로써 당시의 사람들이 그물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았음도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여전히 실물이 발견되지 않은 실이나 옷감 그리고 그물 등 유기물질로 이루어진 생활이기들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자료들을 통하여 그것들의 생김새와 구조 그리고 기능 등을 추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관련 분야의 연구 현황인 셈이다.

그런데 토기 파편에 찍혀 있는 그물 자국은 그릇의 속성 상 빚는 과정에서 실물에 의해 생긴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당시의 그물이 어떤 모양을 띠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며, 그렇기 때문에 실물의 그물 혹은 그에 버금가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찍힌 그물 자국이 오늘날의 그것과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는 정교함을 보인다.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그것이 신뢰할 수 있는 특정한 문화층위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토기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에 제작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그 문화층위가 신석기시대 중기라고 한다면, 토기는 그와 같은 시기이거나 아니면 그것보다도 더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이 토기 파편을 주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토기 파편이 출토된 문화층은, 그 속에 찍힌 그물의 제작 연대를 증명해 주는 보증수표인 셈이다. 그 이유는, 제작 순서상 토기 표면에 찍힌 그물 자국은 그릇을 빚기 이전에 이미 완성된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미 신석기시대에는 보편적으로 그물을 제작하였고 또 그것을 활용하여 어로생활을 하였음도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이 토기 파편 하나가 그물 제작시기의 절대 하한 년대에 대한 그동안의 각종 의구심을 불식시켜 준 것이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서는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그물을 이용한 고기잡이가 일반화되었음을 이로써 확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토기 파편 속에 찍힌 그물 자국은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그물 가운데 가장 고형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것은 대곡리 암각화 속 그물 형상의 편년 설정과 더불어 이 암각화의 사실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곡리 암각화 속에는 두 개의 그물이 그려져 있다. 하나는 주 암면의 왼쪽 위에 ‘U’자형으로 그려진 그물(사진)인데, 중첩된 형상들을 분석해 보면 이 부분에는 최소 세 겹의 덧그리기가 이루어졌으며, 그 중에서 제일 늦게 그려진 형상이 그물이다. 다른 하나는 주 암면과 이어진 왼쪽 암면, 즉 서쪽으로 향한 암면의 오른쪽 끝에 고래와 함께 그려져 있다(도면).

그러니까 대곡리 암각화 속에는 그물과 고래가 서로 결부된 장면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래잡이는 작살자비가 작살을 이용한 것으로만 알려졌으며, 그 마저도 멀리 원양으로 나가서 포경을 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일부 연구자들 가운데는 연안으로 좌초되어 온 고래를 대상으로 하여 포경을 하였을 것이라는 시각을 견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포경방법 중에는 여러 척의 배들이 고래를 포위하고 그물로 가둔 다음, 작살을 던지는 방법도 있다. 그러한 방법을 일본에서는 ‘아미토리(網取り)’식 포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방법이 포경의 성공률을 현저하게 높여주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 방법을 일본 와카야마현 타이지(太地)의 고래잡이 기지에서는 아직까지도 활용하고 있다.

동삼동 패총의 그물 자국이 찍힌 토기 파편은 묻히고 말았을 신석기 시대의 그물 그 자체이며, 당시 동삼동 사람들이 썼던 실제 모습의 일부인 셈이다. 이 자국을 통하여 제작방법을 포함한 그물의 구조 등에 관하여 살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어로 활동에 관한 보다 많은 논의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더욱이 그것이 신석기시대 중기라고 하는 확정된 문화층위 속에서 출토됨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그물 제작시기의 절대하한 연대를 설정하게 하여 주었다. 이는 그물추나 암각화 속 그물의 용도와 제작 년대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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