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자긍심 세울 걸작임을 진정 아는가
민족 자긍심 세울 걸작임을 진정 아는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3.2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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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한국 민족사의 축복 ‘대곡리 암각화’
▲ 지난해 10월 암각화 발견 4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마친 외국 암각학자들이 장석호 박사의 안내로 암각화를 살펴보고 있다.
만감이 교차한다. 저것은 무엇인가 저것이 아무렇게나 쳐 박아 두어도 될 그냥 평범한 바위 덩어리 하나에 불과하단 말인가

저것은 관계 공무원들을 괴롭히는 골치 덩어리 민원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말인가

저것이 손익을 따져야 할 물건이란 말인가

흥정의 대상인가

저것이 정녕 완급을 따져 처리할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유산이란 말인가?

울산시민들도 저것을 정말로 그 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울산시민의 문화 척도가 아직도 미개국민의 수준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래서 저것을 볼모로 삼아 식수와 맞바꾸려 하고 있다는 말인가?

숨이 막힌다. 말문이 막힌다. 계속해서 목구멍 밑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탄식,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나?’

‘어쩌다 저런 대접 밖에 못 받는단 말인가?’

‘우리는 아직 이 정도의 수준 밖에 안 되는가?’

울산은 공업도시의 이미지를 벗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 같다. 국제 포경위원회를 개최하였고, 옹기 축제도 열었다. 박물관 건립의 당위성을 피력하기 위하여 각종 발굴성과를 부각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도 울산으로 유치하겠다는 소문을 접하기도 하였다.

모두 다 중요한 일이며, 추진하고 있는 일들이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일들을 하지 말라고 막지 않는다. 어쩌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방안들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문제를 삼는 것은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있는 것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다른 것을 탐하는 일은 굳이 비유하자면, 물에 비친 개의 먹이를 탐하다 물고 있던 것마저 잃어버리는 욕심쟁이 개와 같은 것이다. 문화 도시를 꿈꾸는 도시의 문화재 관리 실태를 보고 박수만 칠 수는 없는 것이다.

최근에 접한 일련의 뉴스에 따르면, 울산시는 시립박물관 외벽에다 저것의 모사도를 그렸고 또 내부에는 저것을 원형대로 복원해 놓았다고 자랑하고 있다. 저와 같은 모사도가 벌써 몇 번째인가? 월드컵 경기장이나 암각화 박물관, 고속철도 울산역사 등 헤아릴 수 있는 것만 해도 몇 개나 된다. 이러다 온 도시가 모조리 암각화의 모사도로 장식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다고 저것의 가치가 높아지고 울산광역시의 품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이발소에 걸린 밀레의 ‘만종’처럼 귀하디 귀하고 위대한 선조들의 작품을 형편없는 싸구려로 전락시키는 일이나 진배가 없다. 그렇게 하면 문화도시가 되는 것인가? 묻고 싶다. 그런 아이디어를 낸 사람에게! 저것이 지금 현재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그래서 지금 시급하게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저것은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그리고 금세기의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진 발견 가운데서 아직까지도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최고 중의 최고의 것이며, 그것을 관련 연구자들 중 의심하는 이는 없다. 그러므로 그동안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어떤 발견이나 발굴 그리고 그 성과들도 저것과 직접 견주어 지거나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한 저것은 그동안 한반도 내에서 발견이나 발굴된 것 가운데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아직까지 그 연구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저것은 현존하는 문화유산 가운데 어느 것보다 이른 시기의 것임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저것은 한국사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고, 한국 문화의 모든 이야기가 저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조형예술과 공연예술은 물론이고 인문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종교학 심지어는 첨단공학 등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갈 때, 그 정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저것이다.

저것을 통해서 어떤 기록 속에서도 살필 수 없었던 한반도의 고생태 환경과 수수께끼에 싸인 첫 문명인의 삶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저 속에 고래그림이 없었다고 한다면, 국제포경위원회를 울산광역시가 유치하겠다는 발상이라도 하였겠는가?

그러므로 고래 그림들은 국제포경위원회 울산 개최의 일등공신이었던 셈이다. 저것 속에 그려진 형상 하나하나를 세심히 분석하여 보면, 아직까지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태화강 선사문화의 원상들이 또렷한 윤곽을 그리며 드러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저것은 시간이 흐르고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풍부한 제재와 흥미로운 주제, 바위 표면에 남겨진 문화층,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독창적인 양식 그리고 이어지는 문화와의 영속성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 민족의 자긍심을 우뚝 세워준 세계 최고의 선사 미술품이요, 한국사의 시원에 관한 논의를 단숨에 석기시대로까지 소급시킨 민족문화의 원형질이다.

이렇듯 저것 속에는 사람과 동물과 도구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한국 시원문화의 원상들이 조형 언어로 압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저것은 한국 나아가 세계 최고의 문화 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까닭에 저것은 한국사의 여명기를 조형 언어로 기록한 타임캡슐인 셈이며, 또한 우리들을 그 여명기와 이어주는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따라서 누구라도 저 캡슐의 문을 여는 순간, 단절되었던 시간의 갭을 넘어 선사와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저 타임머신을 타는 순간 수천 년의 시공간을 순식간에 넘나들 수 있다. 저것은 한국 시원 문화를 담당했던 우리의 조상들이 인류 문화의 여명기에 남긴 커다란 선물이자 축복이다.

따라서 저것이 수천 년의 풍상을 견디며 오늘에 이어져 온 것은 그야말로 기적 가운데 기적인 것이다. 그 기적과 축복을 가장 무지한 21세기 문명시대의 미개인들이 수장시켜 왔으며, 저것은 신음 한 번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참담한 반세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저것 속에 그려진 형상들은 한반도가 선사 문화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지였으며, 그동안 외부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외래문화를 속수무책으로 수용하였던, 그래서 소극적이며 독창성이 없는 것처럼 인식하였던 한국 선사 및 고대문화의 원상들이 그와는 달리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었으며, 긍정적이자 개방적인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그래서 그동안 직설적으로 언표(言表)되었던 비애, 적요, 쓸쓸함, 고요, 무기교와 무작위 그리고 무계획 따위의 한국미와 그 미감에 관한 수식어들이 얼마나 편견에 차 있었던 것인가를 깨닫게 해 준다.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바깥으로 확장되어 나간 동시대의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우리는 그동안 제대로 이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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