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서울대학 선비가 되어(5)
《제79화》 서울대학 선비가 되어(5)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3.1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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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체절명 위기에서 구해 준 나의 스승 이 상주(2).

김기석(서울대 교육학과)

학사에 이어 석사 지도교수로 모셨다. 키가 비슷하여 스승과 제자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고의 폭이 넓다. 청장년 시절이라 그랬겠지만 진보 철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아마 유학시기가 1년만 늦었어도 당시 정치탄압 사건인 학사주점사건에 연루되어 운동권 교수로 일하다 퇴직 당할 수도 있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간부임에도 불구하고 학생에게 좌우 편향되지 않도록 가르치셨다. 당시로서는 큰 일 날 지도사항으로, “자본론 읽지 않으면 사회과학자가 아니다!”고 갈파 하였다. 워낙 우직한 제자인지라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공부하다가 자본주의경제의 패악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군사독재만 불의(不義) 그 자체로 여겼으나,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보니 실은 자본의 과도한 운동 또한 용서할 수 없는 불의의 원천임을 알았다. 당시 형편으로 자본론을 읽을 형편이 못되어 경제가 인가의 의식을 굴절하는 현상을 분석하는 지식사회학을 공부하였다. 이를 활용하여 석사논문을 작성하였다. 논문 핵심 구성 내용은 물론 지식사회학 관점과 선생이 제공한 의사결정과정 모형을 통합한 것이다. 졸업하자 뜻하지 않게 교직과목 강의를 맡았다. 박사학위도 없는 국내 석사에게 파격적 기회를 준 것이다. 선생께서 “우리가 훈련시킨 제자를 강사로 쓰자”는 제안이 교수회의서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런데 제자 사랑 결정이 당사자에게 절체절명의 위기로 이어졌다.

공대생 대상 강의 진행 석 달 만에 강의를 중단하게 되었다. 77년 5월 대학가에 반정부 시위가 번졌고 공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대생을 선동한 강사로 지목되었다. 사상검증 중, 내 석사논문에 나와서는 안 될 이름인 마르크스가 나온 점으로 보아 “좌경지식인”이라는 추궁이다. 운주(정범모 교수) 등 은사가 개입하여 사상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로 자진 사직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현대사 그 범주조차 없는 “퇴직 강사”가 되었으며, 국내 어디서도 강의를 할 수 없는 버려진 돌이 되었다. 충고는 미국에 가서 학위를 마치면 복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유학을 준비하였고 운주 선생님이 이 길을 안내 해 주었다. 출국이 불가능하였다. 당시 신원조회가 안 나오면 여권이 안 나오던 시절이었다. 2년 넘게 기다린 끝에 여권을 손에 쥐었으나 이번에는 미국 비자가 안 나왔다. 절망의 순간에 선생이 나섰다.

선생은 대사에게 다음 세 가지를 보증한다고 편지를 썼다. 학위를 받을 것이다. 귀국 할 것이다. 국내 대학에 취직할 것이다. 당시 정문연의 기획실장이란 고위급 인사 자격으로 편지를 써주었다. 그 덕에 비자가 나왔다.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의 길로 접어 든 것이다. 79년 10월 말 경, 부부가 함께 출국 인사를 갔다. 미국 출장서 돌아 온 선생은 최신 사진기 폴라로이드(즉석 인화)를 보여 주었다. 이 사진기로 선생 내외분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지난 22년 간직하다 보니 금이 많이 갔다. 유신체제에서 대학에서 쫓겨난 퇴직 강사는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이었다. 선생이 아니었다면 유학도 불가능하였고, 학위를 마칠 수도 없었고 또 관악에서 제자를 가르칠 수 없다. 아마도 룸펜 프롤레타리아로 평생을 살 제자였으나 선생의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열정과 역량 덕에 학자 구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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