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를 물속에 상시로 담가놓은 나라가 어딨느냐!”
“국보를 물속에 상시로 담가놓은 나라가 어딨느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3.13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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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호 박사의 암각화 이야기:원초적 경험들의 표상
▲ 사진은 장석호 박사가 2000년 반구대 암각화를 실측한 뒤 색채를 그려넣은 도면.
본지는 30년간 암각화를 연구한 장석호 박사가 원숙한 필체로 그려내는 암각화 의미와 가치에 대한 글을 매주 한 차례 연재한다.

장 박사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다. 1990년대부터 세계 각국의 암각화를 찾아다니며 비교연구했다. 10년전 울산의 2개 암각화를 실측·조사했다.

이번 연재는 지금까지 써오던 논문 형식에서 비켜나 자유로운 서술형식이다. 따라서 오랜 연구활동에서 겪었던 극적인 경험들이 암각화 해석 사이사이에 흥미롭게 전개된다. 외국에서 놀라운 그림을 찾았을때의 환성, 뱀 구덩이에 빠져 질렀던 비명 등 현장을 누빈 학자의 육성이 생생히 전달될 것이다.

연재 글의 제목은 ‘대곡리 암각화: 원초적 경험들의 표상’이다. 장 박사는 태화강 상류 대곡천 암각화에는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자고 사는 모든 삶의 첫 장이 기록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이 기록의 해석을 통해 울산의 오늘을 이해하고 미래도 읽을 수 있다고 본다.

이번 연재는 암각화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아울러 대곡천 암각화가 세계 속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이해할 기회가 될 것이다. <편집자주>

훼손 위기감만 조장하고 방법론 제시 머뭇

연구다운 연구없는 부끄러운 자화상 보듯

1. 부끄러운 자화상

-흙탕물 뒤집어 쓴 암각화

▲ 지난 2월 답사때 본 이끼 붙은 반구대 암각화.

대곡리를 나는 지난 2월에 두 차례 답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계곡은 마치 내가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내 마음의 고향처럼 정겹고 또 포근하다. 잿빛의 산들과 물이 올라 색깔이 바뀐 나뭇가지 끝으로 저만큼 봄이 다가와 있었다. 적당히 바닥을 드러낸 대곡천!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녹아 물 흐르는 소리도 제법 졸졸거렸다. 반구대 앞에 서서 명문 ‘반구’를 새겼던 선인들의 속내가 무엇이었을까 탐해 본다. 그들은 이 계곡에서 그 거북 말고 또 무엇을 보았을까? 그리고 동산을 휘돌아 흘렀을 계곡은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의 물길을 이루었는지도 궁금하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익숙한 풍광들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훑고 스쳐 지나버리는 시습관(視習慣)에 또 한 번 진저리를 친다.

다시 대곡리를 찾았을 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림이 그려진 암면은 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신분을 밝히며, 보기를 청하자 관리인은 자물통이 채워진 문(?)을 열어주었다. 계곡을 들어오면서 만났던 이장 내외는 그냥은 건널 수 없고 배를 타고 가야 한다고 하였다. 물가에서 손수 저어 온 이장의 배로 대곡천을 건너려 하자, 관리인이 황급히 달려와 건너면 안 된다고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렀다.

유적지를 지키는 관리인은 허가 받지 않고 왔다고 암각화 앞으로 다가가는 우리 일행의 접근을 무조건 막았다. 군청관계자와 통화를 시도하더니 전화기를 건네주었고, 우여곡절 끝에 건너가서 봐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분이야 그에게 부과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던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암각화를 보는데 반드시 수자원공사나 울산광역시청 또는 울주군청 관계자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불국사나 석굴암 등지의 관광객들이 모두 관계기관의 허가를 받고 다닌다는 말인가? 만약 그런 법이 있다면, 그곳에 ‘문화재 관리법 제 몇 조 몇 항에 의거 접근을 금지 한다’는 팻말이라도 써 붙여 놓아야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누구의 발상인가?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의 월권이 아닌가? 이렇듯 접근을 막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터인데, 그것은 무엇일까? 암각화 유적지 앞으로 다가가는 것을 막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새삼 궁금하였다. 설마, 문화재란 원래 허가를 받고 보는 것이라고 믿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혹시 있을 지도 모를 고의적인 훼손을 두려워해서 그랬나?

아마 수자원공사가 이 댐에 물이 차면 수심이 20m 가량 깊어지니 사고위험을 우려했거나, 수질오염을 예방하려는 수단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갈수기다. 수심이 1m도 채 안된다. 이럴때라도 가까이서 보고싶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줘야 할 것이다. 수심이 깊거나 얕거나 일률적으로 막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밖에 또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무언가 감추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온갖 상상을 하면서 마을 이장이 준비해 온 배에 올랐다.

긴 시간, 물속에 잠겨 있어서 먼발치에서 위치만 확인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소중한 민족의 보물, 일 년 중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모습을 드러내는 그 암각화를 이렇게 직접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관리소 앞에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서 이미 물때들이 잔뜩 끼어 있어서 형상을 알아 볼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확인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눈앞에 드러난 바위는 끔찍하게도 흉물스러운 몰골을 하고 있었다. 온 암벽에 끼었던 물때는 말라비틀어져 덕지덕지 더럽게 형상들 위를 뒤덮고 있었고, 두껍게 자란 이끼는 찰거머리처럼 암면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어느 형상 하나라도 멀쩡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다. 눈앞에 드러난 이런 참담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어찌 이것을 국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이런 일이 이번 한 번의 이례적인 것이 아니라 발견 이후 매년 지속되어 왔다는 점에 심각성이 있다. 아마도 조만간에 연례행사처럼, 누군가 높으신 분이 납시거나 언론에서 이 문제에 조명을 비추기 시작하면 ‘청소를 하네!’ ‘보존 대책을 마련하네!’ 하고 야단법석을 떨겠지? 그리고 높으신 모씨가 현장을 다녀갔다는 사진들이 뉴스 매체들을 장식할 터이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방문은 이 국보의 또 다른 이력이 될 터이다.

그가 뱉은 한 마디 말씀은 금과옥조처럼 회자될 것이다. 좋은 현상이다. 모두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런데 그 숱한 시간들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왜 아직도 이 모양 이 지경인가? 그런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들로 그들의 역할은 끝난 것인가? 그런데 정작 그런 말들이 얼마나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들은 모른다. 물어보고 싶다. 세계 어느 나라 국보가 상시로 물속에 잠겨 있으며, 그 보존에 네 탓 내 탓을 따지는지?

지난 해 10월, 국제 암각화 학술회의를 마친 후 해외에서 참가한 저명한 연구자들이 대곡리를 답사하고 보내 온 리포트 형식의 소감 가운데는 대곡리 암각화가 물속에 잠기기를 되풀이하는 이상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논의는 이루지기 힘들 것이라는 고언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보존 방안이라면 그런 대책을 굳이 수립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지적이 들어 있었다. 이 암각화는 울산광역시의 것도, 수자원공사의 것도, 문화재청의 것도 아니다. 이 암각화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여준 동아시아 최고의 선사미술 가운데 하나이며, 이 암각화 속의 도상 하나하나는 한국사의 시원을 해명해 줄 중요한 열쇠들이다. 굳이 억지스러운 비유를 하자면, 이것은 망실되면 복원이 불가능한 귀중한 우리 모두의 것이다.

어찌 되었건, 암각화가 오물이 뒤섞인 흙탕물을 뒤집어 쓴 것은 현실이며, 그것이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는 점은 매년 우리가 국보에다 오물을 끼얹는 일에 동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은 책임은 다른 누구보다도 연구자들에게 있다.

그동안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내어놓은 실현 가능한 방안은 하나도 없었고, 한 일이란 결국 울산광역시나 문화재청만 성토하고 다닌 것이 전부다. 암각화가 풍전등화라는 위기감만 조장하였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더욱이 한심한 것은 그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그 속에는 정확히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 속 시원하게 밝힌 연구다운 연구도 없었다. 그러므로 울산광역시나 문화재청 관계자들을 탓할 자격이 연구자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채 연구자임을 자처한 것이 오늘의 내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대곡천 처음 본뒤 불멸의 연인으로 각인

30년간 세계 암각화 찾아 비교연구 몰두

2. 대곡리 암각화의 마력

 

 

▲ 지난 2월 마을이장이 쪽배를 저어 암각화를 보여줬다.

대곡리. 이 말을 떠올리면, 비록 극히 짧은 순간일지라도 지나간 날들의 온갖 일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눈을 감으면, 잡힐 듯 펼쳐지는 영상들. 대곡천을 가로지르는 그 다리를 건너면, 태고의 경관과 신비로움이 아직도 계곡 구석구석에 남아 있고, 또 대대로 그곳에서 터를 지키며 살아오던 마을 사람들의 요란함이 없는 삶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그곳은 새롭고 또 모르는 것이 많은 생소한 공간이다. 여태껏 그곳으로 나의 발길을 이끌었던 것은 사실 빼어난 경치로 일찍부터 경향각지에 소문이 자자했던 경승지 반구대도 아니었고 또 불쑥 찾아가도 한결같이 반갑게 맞아주는 그 마을 이장 내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곳에서 태어났다거나 혹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살고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 계곡에 선사 시대의 암각화가 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곡리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8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 나는 대구에서 살았는데, 대곡리까지 가는 길은 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또 한참을 걸어야 했을 만큼 꽤 힘이 들었다. 태화강 건너편에 있던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후, 곧장 언양행 시외버스로 갈아타야 했고, 언양에서도 다시 두동 쪽으로 가는 완행버스로 바꿔 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속도로 위로 난 육교 앞에서 내린 다음에는 바쁜 걸음을 걷지 않으면 두 곳을 모두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부지런히 서둘러야 어둑어둑 해질녘에 그 고개를 겨우 넘어 되돌아 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만 하여도 암각화 유적지 앞까지 차로 들어가는 길은 나 있지 않았으며, 천전리는 징검다리를 건너고 사나운 개가 지키던 기도원을 지나야 갈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어언 30년이 흘렀다. 첫발을 내디딘 그날 이후, 나는 암각화라는 묘약에 취해 그것만 바라보고 살았으며, 아직껏 한 번도 그것에서 시선을 거둬본 적이 없다. 대곡천 계곡을 따라 아래 위에 남겨진 두 개의 암각화가 나의 불변의 연인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암각화가 나의 발길을 그곳으로 이끌어 들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멀고 또 찾아가기 힘든 길이었지만, 그리고 또 홀로 그림을 보고 돌아가는 길은 조금 쓸쓸했지만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괜한 걸음이었다고 후회해 본 적이 없다. 돌이켜 보면, 지난 30여년의 세월은 이 암각화라는 연인의 진면목을 찾아 헤맨 숱한 시행착오의 시간들이었다. 또 이 두 개의 암각화는 그때까지 내 가슴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날려버렸으며, 용감한 전투사로 나를 거듭나게 하였다.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 저 멀리 신기루가 꿈처럼 떠올랐다 뒷걸음질 쳐 가는 몽골의 고비 알타이에서 나는 대곡천의 두 암각화의 제재에 관해 생각하였다. 레나 강변 쉬쉬키노의 회랑을 거닐면서 암질과 제작 기법의 상관성 그리고 현지 주민들의 유적지에 관한 특별한 관념 등을 살필 수 있었다. 톰 강변의 암각화를 조사하면서 유적지와 물 그리고 햇볕의 또 다른 메커니즘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뱀들이 우글거리던 시베리아 술렉크스카야 피사니차나 살라비요브스카야 피사니차의 스텝에서 맞닥뜨렸던 들개 무리를 앞에서 두려움을 쫓기 위해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은 최면을 걸었던지? 그러면서도 나는 대곡리를 풀어내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 정말로 미친 듯이 세계 여러 지역의 암각화를 뒤지고 다녔다.

어디 그곳뿐이었을까? 에니세이 강변 쉬쉬카 암벽에 내리비친 마지막 한 줄기의 석양은 낮 동안 긴 잠에 취해 있던 도상들을 하나씩 깨워 기지개를 켜게 하였고, 그 순간 나는 빛 때문에 죽었다가 빛으로 되살아나는 형상들의 부활을 숨죽이며 지켜볼 수 있었다. 몽골의 바타르 하이르항과 으브르 바양 아이락 그리고 하카시야의 후르차흐 홀 등지의 암각화 유적지 앞에 바쳐진 산양과 백마의 머리 그리고 백골이 된 황소의 머리뼈 등을 통해서 현지 주민들은 아직도 정기적으로 희생제물을 바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카렐리야의 아네가 호숫가 ‘베소브이 노스’ 암각화를 채록하고 되돌아오던 도중에 미끄러져 물에 빠진 나는 허우적거리면서 비로소 전설처럼 전해져오던 암각화의 저주를 실감하고 몸서리쳤다.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답사하면서 암각화 유적지의 공간적 보편성을 보다 분명히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런 여정 가운데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직업이 무엇이었던 그들은 나의 소중한 선생님들이었다. 쉬쉬키노에서 만났던 L.멜리코바 박사, 이르쿠츠크에서 만났던 G.메드베데프 교수, 케메레보에서 만났던 A.마르티노프 박사,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났던 B.데류긴 박사, 몽골에서 만났던 D.체벤도르지 소장, 아바칸에서 만난 N.보코벤코 박사, 크이즐에서 만난 M.킬루노브스카야 박사, 카자흐스탄의 Z.사마세프 박사, 키르기스스탄에서 만난 T.차르기노프 박사, 후곳페에서 만났던 아사노(淺野敏昭) 선생, 모스크바 고고학연구소의 M.데블레트와 E.데블레트 모녀 박사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연구소에서 만났던 선생님, 그들과의 시간들이 늘 유쾌하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내 암각화 연구의 행로에 새로운 동기와 방향을 제시해 준 스승이자 소중한 동료들이었다.

홀로 다니던 이국의 암각화 유적지 탐사 여정에서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졌던지? 노르웨이의 솔베르크 유적지까지 안내해 주었던 버스기사의 친절함이나, 아네가 호수를 건너게 했던 군함 같던 큰 배의 주인 등을 세월이 흐른다고 잊을 수 있을까? 핀란드의 어느 시골에서 만났던 할머니는 베풂이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분이다. 길을 잃고 오지도 가지도 못하던 나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셨던 할머니.퇴직 후 소일거리로 만든 첫 번째 작품 나무인형을 나는 그날 이후 아직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 시절 열정과 의욕만 앞서 저질렀던 숱한 나의 실수들은 지금의 연구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필름을 아끼느라 사진도 선별하여 찍을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정으로 인해, 메모나 스케치로 대신 했던 찍지 못한 형상들, 그리고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운 풍광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언제 다시 그 곳으로 갈 수 있으며, 간다고 해서 그때 그 장면이 아직까지도 남아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설고 물선 이국의 암각화 유적지들을 용케도 잘 찾아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어지간히 간이 컸던 모양이다. 지금도 해마다 여름이면 중앙아시아의 바위그림 유적지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그러나 그때의 낭만은 이미 없어지고 말았다. 이 모든 기억들이 ‘대곡리’라는 말 속에 뒤엉켜 있다.

 

글쓴이소개

장석호(張錫浩) (현)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국립 연구소에서 고대문화 연구

 

대곡리암각화·천전리각석 실측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1981~1985) 및 동대학원 회화과(1985~1987)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2년간 몽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고고학연구실에서 바위그림을 연구하였으며,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물질문화사 연구소에서 시베리아 예니세이 강 지역의 바위그림을 집중적으로 조사·연구하였다. 1999년에 ‘중·동아시아의 바위그림-문화사적 발전과 해석의 문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계명대학교, 경북대학교 대학원, 대구예술대학교 등지에서 강의하였으며, 2002년에는 학술진흥재단의 ‘보호학문’ 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연구비를 지원 받고 과제를 수행하였다. 2004년 5월부터 2006년 9월까지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을 거쳐 2006년 9월부터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동북아시아의 선사 미술(암각화)을 중심 테마로 하여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아울러 국보 제285호 대곡리 암각화를 2000년에 정밀 실측하였고, 그 도면은 예술의 전당 ‘신화, 그 영원한 생명의 노래’전을 통해 2개월 동안 전시되었다. 2002년에는 국보 제145호 천전리 각석을 실측하였다. 그에 관한 보고서는 2003년에 간행되었다. 또한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하여 계명대학교 박물관 2층 로비에 상설 전시된 ‘천전리 각석’ 실측 도면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몽골의 바위그림’(혜안, 1995)과 공저 ‘몽골의 암각화’(1998, 열화당),  ‘시각예술에서 이미지란 무엇인가’(눈빛, 2003),  ‘중앙아시아의 바위그림’(동북아역사재단, 2007),  ‘몽골 고비알타이의 암각화’(동북아역사재단, 2008),  ‘몽골 서북부 지역의 암각화’(동북아역사재단, 2009),등이 있고, 역서로 요코야마 유지 저 ‘선사예술기행’(사계절, 2005)이 있다. 또한 조사 보고서로 ‘국보 제 145호 천전리 각석’(울산광역시, 2003)가 있다.
논문으로 ‘한국 선사 시대 암각화의 양식 연구’(한국역사민속학회, 2003), ‘동북아시아 속의 대곡리 암각화’(고구려연구재단, 2005), Prehistoric painting of whale-hunting in Korean Peninsula: Petroglyphs at Daegok -Ri(World of Rock Art, Moscow, 2005), ‘국보 제 285호, 대곡리 암각화의 도상해석학적 연구’(한국고대학회, 2007), ‘이미지 살해’(역사민속학회, 2010), ‘중앙아시아 고대 암각화와 고구려 구분벽화의 주제 및 양식 비교연구’(중앙아시아학회, 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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