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서울대학 선비가 되어(4)
《제78화》 서울대학 선비가 되어(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3.10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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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학으로의 학생들의 쏠림에 관해 나는 지금도 학생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대학의 선비로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분명히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하게끔 나를 놓아두지 않아서 학생들 지도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잠시라도 시간이 마련되면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학생들과 만나서 일하는 시간으로 할애하였다. 그때 자주 만날 수 있었던 학생으로는 김기석, 고형일, 이미나, 김명숙, 박부권 등이 교육사회학을 전공하려고 했었다. 이들을 포함해 약 2,30명이나 되었었다.

정리자(박해룡)가 당시의 제자를 찾았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김기석 교수와 연결이 되어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상주 교수와의 인연을 풀어달라고 간청하였다. 아래의 글은 김기석 교수가 직접 보내온 것이다. 독자의 양해를 바란다.

절체절명 위기에서 구해 준 나의 스승 이상주(1)

김기석(서울대 교육학과)

67년 직후 이 상주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 동기생 모두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영어로 “Be different!”를 설파하여서 이다. 다를 것이 없으면 바지 한 쪽이라도 거두어 올려 남과 달라지라는 말씀이다. 이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그랬는지 우린 4년 내내 한 가지에 몰두하였다. 아주 오래 동안 학내 고질화된 패배의식의 타파였다. 입학 석 달 만에 사대 강당에서 있었던 총선 개표부정(후에 6.8 부정선거로 알려짐)을 목격한 다음 신입생 대부분이 학내 4.19 동상아래서 단식농성을 감행하였다.

순전히 신입생 20명이 내부 토론 결과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후에도 불의부정에는 사자 떼처럼 덤볐다. 교련(군사훈련)반대, 3선개헌반대 등 군사독재를 거부하는 학생시위가 있으면 늘 남과 다르고자 한 67학번 동기생이었다. 졸업반이 되면 고개를 숙일 때가 되었건만, 동기생 몇 명은 청량대 동산에서 “Dirty Brothers” 결연을 맺고 사대 내 팽배한 온간 무기력, 패배의식, 열등감 극복을 위해 온갖 지저분한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교육심리연구실에서 먹고 자며 공부도 했다. 학부생 초유로 학술논문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당시 결연 5 형제 중 4명이 그 공부의 연장으로 “동부(미국)개척사”에 참가하여 학위를 마쳤다.

정의 실현만 배운 것이 아니다. 선생은 어렵게 꼬인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데 탁월한 분이다. 수업 시간에도 어려운 대목이 나오면 늘 칠판에 모형이나 도형을 그렸다. 그림을 보자면 그처럼 복잡한 현상이 한 번에 들어온다. 좋은 뜻이나 나쁜 뜻에서, 교육학과를 늘 “방법론학과”로 여긴다. 뛰어난 문제해결 능력은 아마도 운주(정범모 교수의 호) 선생으로부터 연원 될 것이다. 이 전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분이 선생이다. 자연 학생들도 칠판에 그림이나 모형을 그려가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방법론이 몸에 배게 되었다. 미국 유학 중에 짧은 영어 탓에 표현이 모자랄 때, 모형을 사용하여 위기를 극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선생은 사회봉사 영역에서도 이런 식으로 난제를 해결한다. 교육심리연구실에서 한국행동과학연구소를 탄생시킬 때, 또 개발원을 창설할 때도 그랬다. 특히 당시 정치학자와 인문학자 대립으로 기관 창설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해결사로 등장하여 마침내 두 세력을 아우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창설이란 위업을 이룬 것이다.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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