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유학생활(8)
《제73화》 유학생활(8)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2.27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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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주점’을 먼 산의 불처럼 보고만 있었다.

1970. 9월 초,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눈을 부치는데 스쳐지나가듯 떠오르던 생각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어쩌다 그때의 일이 떠오를 때면 기분이 착잡해진다. 다름 아닌 ‘학사주점’ 사건이다. 내가 1967년에 유학을 떠난 그 이듬해에 학사주점 관련자들이 검거되고 상당수의 친구들이 고통을 받았다. 그 때 나는 미국에서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런 장면이 인생의 무대에서 연출될 때면 누구나 운명적이었다고 생각될 것이다. 나의 유학이 1년만 늦게 추진되었어도 나의 인생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도 ‘학사주점(學士酒店)’이라는 낱말이 어떤 일들과 관련이 있는지 당시의 사건 전말(顚末)을 알아야 내가 왜 운명적이었다고 하는지 이해가 간다. 다음 이야기는 1968년 8월 24일, 주요 일간지에 보도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968년 8월 23일,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에서 통일혁명당 간첩사건을 발표하였다. 이 당은 남한에 고정 간첩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를 중심으로 ‘제2의 월남 사태’를 획책하는 지하조직이었다. 이들은 1)과거 남로당(남조선노동당)계의 규합, 2)청년지식층을 포섭해 기회가 오면 남한에서 조직적으로 봉기하여 혁명을 일으키고 북한과 통일하려고 했었다. 이 당의 최고 책임자 김종태는 4회에 걸쳐 북한을 다녀왔고, 북한의 노동당에 당원이 되었고, 많은 자금을 북한으로부터 받아왔다. 통혁당의 전위조직으로 ‘조국해방전선’이 구성되고 이것이 바로 ‘학사주점’이었다. 서울의 명동과 광화문, 그리고 지방의 주요 도시에 있었다. 이문규는 서울의 학사주점 초대 대표였다. 그는 공군중위로 제대하였고, 남조선혁명지도부 지도책으로 월북하여 노동당에 입당하였다. 위의 세 사람은 1969년 1월 25일 선고공판을 받고, 1969년 11월 6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통혁당 사건은 2010년 월간조선 10월호에 북한에서 제주도에 특수부대를 잠입시켜 김종태 특히 이문규를 월북 시키려 하였다가 일망타진 된 사실이 42년 만에 밝혀져서 다시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1967년(?) 이문규를 대구에서 비밀리에 체포하고 그의 집을 압수 수색하는 과정에 북한의 암호체계를 입수하여 이 암호로 북한에 이문규가 자신을 구조해 달라는 암호전문을 보내어 이북으로 데려가러 온 특수부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모두 사살하고 2명은 생포하기까지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 중의 하나인 이문규는 내가 공군 각종 장교 교육을 받을 때, 나보다 1년 먼저 공군에 들어와 이웃 구대의 구대장(소위)으로 있었다. 학사주점이 잉태되는 초기로 돌아가 본다.

나는 대학시절 연세대 정외과 학생들과 자주 어울렸다. 1주일에 한 번씩 모여 그동안 읽었던 책에 관해 토론을 하였다. 그 때 함께 읽었던 책은 당시 젊은 학생들의 주관심사였던 실존주의 문학과 실존주의 철학에 관한 것들이었다. 지금 기억되는 이 토론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이성근, 안병준, 유근호, 박충석, 그리고 나였다. 재학시절에는 대학시설을 이용하여 토론회를 가질 수 있었지만 졸업을 한 후에는 그렇게 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학생 때처럼 정기적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기발한 아이디어가 학사주점을 차리는 것이었다. 밖으로 내세운 명분은 ‘땅에 떨어진 주도(酒道)를 확립한다’는 것이었다. 학사주점을 개업하려면 4~50명의 주주가 있어야 했다. 연세대의 한태수 교수의 연구회에 참가하고 있던 대학졸업생들 40여명을 학사주점의 주주로 끌어들였다. 각자 2만5천 원씩 갹출하여 명동에 전세를 하나 얻어 술집을 차렸다. 공군 장교 시절의 나도 주주가 되었다.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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