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과 산불
봉산과 산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2.23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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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封山)이란, 수군절도사영의 관리 아래 전선(戰船)의 재료와 나라에서 필요로 할 경우에 목재를 조달하고 일반인의 이용을 금지하기 위해 설정한 산림이다.

1749년 편찬한 울산의 읍지인 ‘학성지’에 따르면 울산에서 전선을 제작한 곳은 도산(島山=시루성, 지금의 학성공원) 아래의 내황포구 일대의 선소에서 시작했다가 경상좌수영이 있는 성암동 개운포로 옮겨 갔다. 개운포에는 ‘선수’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것은 전함을 만드는 ‘선소’가 와전된 것이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의 1789년 정조 13년 울산관련 기록에는 소나무 밭에 들어 가는 것이 금지된 후 울산과 밀양에 쌓여 있는 낙엽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이 보인다.

1790년에는 “서생포와 두모포(지금의 기장 대변 인근)의 전함(戰艦)을 만들기 위한 재목을 경상우도(慶尙右道)의 봉산에서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청원을 하고 있다. 1796년 이후 비슷한 내용이 여러 차례 나온다. 개운포에서 전선을 개조하기 위해 경상좌수영 관할 대운(大雲)봉산의 소나무는 그 크기가 작아서 전선용으로는 사용할 수가 없으므로 우도 봉산의 소나무를 사용할 수 있기를 청원하고 있다.

울산 지역의 봉산에도 소나무가 자라고 있을 텐데 굳이 우도 봉산에서 가져다 쓸 수 있도록 청원하는 그 이유는 다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1759년 울산의 백성이 봉산에 들어가서 실화(失火)를 했다고 지적한다. 이후에도 울산과 기장, 밀양 등지에서 산불이 계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1759~1835년간에 12건이나 실화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서 당시에 얼마나 자주 산불이 발생했는지 알 수 있다.

1790년 정조 14년에는 동래와 울산 등지의 산불로 인한 소나무의 소실(燒失)보고와 함께 “남아있는 나무의 수효를 헤아려 보고하고, 검칙(檢飭)하지 못한 죄상을 묻자”라는 내용과 함께, 수령이 스스로 자신을 벌해 달라는 청원을 올리고 있다. 1835년에는 “지방관(地方官)에게 논죄(論罪)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에 대해, 실화의 근본 원인을 상세히 밝혀 다시 보고하라고 했다.

국가 방위체계에서 전선의 확보를 위해 봉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연료는 오로지 목재이며, 소나무의 솔방울과 낙엽인 솔가지 등에 의지하였기에 눈앞에 뻔히 보이는 솔가지를 두고 봉산이라해서 그냥 남겨두기엔 너무나 애태우는 실상임은 경험 없이도 알 수 있다.

새마을사업으로 우리 나라의 산천이 너무나 푸르러, 산에 가기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다. 민둥산은 배고품의 바로미터였던 시절이 있었다. 발밑으로 돋아나는 풀조차도 옛 시절을 생각하면 그저 아깝고 고마울 따름이다.

애림녹화 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지던 5공화국 시절까지만 해도 구·군에 산불이 나면 구·군수의 직위가 흔들릴 정도로 엄정한 책벌을 받았다. 그래서 구·군수가 미우면 고의로 산불을 내 좌천시켰다는 얘기도 있다. 그와는 거꾸로 산불이 자주 나면 산림과장 같은 고위직을 다른 곳에 보내면 그쳤다는 얘기도 있다.

최근 울산의 일각에서 잊은 듯하면 발생하는 산불을 떠 올리게 한다. 산에 갈 때는 그래서 백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백성이 나라를 위해 지녀야 할 덕목인 산불조심은 예나 지금이나 강조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 나라를 경영함에 있어 치산(治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봉산에서 살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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