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어른이 되었다(2)
《제63화》 어른이 되었다(2)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2.0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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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헌병들을 잡고 말겠다는 집념이 솟구쳤다. 이 일을 그냥 지나쳤다가는 큰 돌에 맞은 어깨의 상처가 화병으로 악화될 것 같고, 같이 데이트하던 가정교사 집 딸에게 도저히 체면이 서지 않아서 지름길을 택하여 수유동 버스 정류소까지 달렸다. 한참을 기다리면서 여기 저기 술 취한 헌병들을 찾았으나 그들은 다른 길로 도망치거나 나보다 먼저 달려가 버렸는지 찾을 수 없었다. 그냥 돌아설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음 날 공군사관학교 평가관실로 출근하여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범인도 현장에 확인 차 다시 와 본다고 하듯이 그들이 나를 찾을 것 같았다. 그들은 헌병이고, 나의 계급, 공군사관학교 교관, 그리고 내 이름을 알고 있으니 꼭 어떤 연락이 올 것 같아서 막연하지만 기다리기로 하였다.

드디어 한 이틀이 지난 뒤 헌병대라고 하면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었다. 나도 도봉산 밑에서 헌병들로부터 봉변을 당하면서도 헌병 하나의 이름을 외워두었던 참이라 그 이름을 확인시켜주면서 그들을 안심시켰다. 마음을 놓게 하고 헌병대 소속을 물어보았다. 순수하게 소속을 밝히며 사과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는 다짐을 스스로 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 날 옛날 병무청 자리, 동화 백화점(지금은 신세계 백화점) 뒤편에 자리 잡고 있던 당시로서는 유명했던 헌병부대를 찾아갔다. 어느 군의 헌병 부대인지 차마 밝히지 못한다. 마침 그 부대에는 친지가 법무장교(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우선 이 장교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였다. 한마디로 ‘헌병이 장교에게 이럴 수 있느냐?’는 군대 기강의 근본 문제를 제기하며 좀 더 철저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결론짓고 돌아왔다. 그 친지로부터 통보된 바로는 나에게 행패부린 헌병들 모두를 찾아 강한 기압을 주었노라고 하였다. 아마 다음 날 모두가 공군사관학교로 가서 용서를 빌 터이니 적당히 해주라고 타협을 해왔다.

그러나 공군사관학교에 같이 근무하고 있던 제15 기의 법무장교(이상우 소위)를 중심으로 모두가 분개하고 있었다. 다음 날 우리 부대 정문 옆에 헌병들이 횡대, 차렷 자세로 서서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것을 보고 반 쯤 분이 풀려 부대 장교들에게 퇴근길에 내 대신 헌병들을 교육 시키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따라 공사 교관들과 다른 장교들이 퇴근하면서 일부는 체벌(?)로, 일부는 말로 혼을 내주었다. 대략 10여명의 장교로부터 혼이 난 걸로 기억하고 있다.

여기 이런 회고록에서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은 다른 장교들의 교육(?)을 끝으로 나에게 행패부린 헌병들에게 용서가 내려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정도 했으면 되었지 않은가라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으나 철저한 집념의 결과는 달랐다. 행패부린 헌병들 중의 한 사람은 친형이 공군 파일럿으로 현역 장교였다. 이 장교 외에도 다른 고위층을 통해 여기저기서 압력과 타협이 들어왔다. 이때는 이미 공군사관학교 법무장교가 군법회의를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압력은 더 다양하고 거세었다. 적당히 용서하고 더 크게 확대 시키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나의 생각은 달랐다. 집념이 더 굳어지고 있었다. /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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