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어른이 되었다(1)
《제62화》 어른이 되었다(1)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1.3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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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 의례(儀禮)로 상투를 틀어 올리는 것이 있다.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면 상투를 틀어 올려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혼인을 하면 이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방식으로, 즉 혼례를 치렀다는 표시로서 상투를 틀어 올린다. 이것은 조선시대 말까지 내려온 관습이었으나 일제의 단발령이 내리고부터는 없어지기 시작했다. 대신 서양의 풍물이 들어와 결혼하면, 특히 여성의 경우 반지를 끼고 다니는 풍습이 생겼다가 지금은 이것도 시들해졌다. 반지를 안 끼었어도 결혼한 사람일 경우가 더 많게 되었다.

나는 1963년 3월 30일 혼례를 치렀다. 만 26세에 어른이 되었다. 공군 중위 때였다. 약혼 때 백금반지를 받아서 결혼 때는 고급시계를 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혼례를 치렀다. 신부는 구홍희, 미술학도였다.

지금도 집 사람은 내가 먼저 프러포즈했다는 것을 확실하고, 자신 있게 말한다. 이 말에 내가 이의를 달아도 믿어줄 사람은 없다. 내가 가정교사로 들어갔던 집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처남이 된 집 사람의 동생을 가르쳤다. 내가 성실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관찰하시고 어른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를 인정해주셨다. 집사람도 내가 처음 자기 집에 들어섰을 때, 문틈으로 보았었음을 고백한다.

결혼에 성공한 것도 일종의 집념이었다. 데이트할 때면 공군 장교복장을 하고 다녔다. 근사하게 보이려는 나의 집념이었다. 또한 남의 시선을 받기도 했다. 기억도 생생한 것은 그날이 10월 24일, 당시에는 ‘유엔의 날’이라고 이 날을 공휴일로 정하여 모든 국민이 유엔의 도움에 고마워할 때, 우리는 도봉산으로 그림 그리는 데이트를 하러 갔었다. 가을철 단풍이 일품이었다. 미술대학 학생이던 집사람은 그림을 다 그리고 공군 장교 복장을 한 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거의 산 아래로 내려왔는데, 헌병들이 술에 취해 개울 건너편에서 우리가 내려가는 쪽의 민간인들에게 희롱을 부리고 있었다. 지금도 집사람은 나를 두고 ‘국민 교육자’라고 하는데 그때도 나는 이런 헌병의 난동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군인의 기강을 잡아주는 민간인의 경찰과 같은 사람들이 술주정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제지(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큰 소리로 나무랬다. ‘나, 공군 사관학교 교관이야. 장교야. 헌병들이 민간인들에게 이렇게 행패를 부리면 되나?’라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랬더니 술 취한 헌병 대 여섯 명이 마침 잘 됐다는 듯이 개울을 건너와 나에게 돌을 던지며 행패를 부렸다. 나는 혼자서 술 취한 이들 헌병들을 상대하는데 체격들도 다부지고 또 그런 사람들로 뽑은 헌병들이라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다른 민간인들은 무서워서 이 장소를 피하여 내려갔는지 감히 끼어들지도 못하고 있는데,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공군장교 복장을 한 사람이 눈에 띠어 같은 장교로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사람은 내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냥 지나쳐 내려가 버렸다.

여기서 ‘사람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줄 모른다.’는 격언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장교를 오래 뒤에 대학의 총장과 교수 신분으로 같은 대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너무나 어색한 재회였고, 그는 수년간 나를 피하였다.

나 혼자만 등에 큰 돌을 맞고 길에 쓰러졌다. 헌병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다.

/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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