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일본에서는 유치원을 다닐정도로 살았다
《제49화》 일본에서는 유치원을 다닐정도로 살았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12.28 21: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시까지 부산(釜山)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사이를 운항하던 연락선)에 근무하셨다. 집은 시모노세키에 있었다. 그런대로 살만한 여유가 있었던 같다. 내가 소화유치원을 마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웬만큼 살면 모두 유치원을 보내지만 당시로서는 조선 사람 일부가 그런 혜택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고서 일본 소학교(사꾸라야마)에 입학하여 2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교육행동 자체가 인류만의 유전적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그랬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 여자 선생님의 ‘가르치는 행동’에서 ‘모든 학생에 대한 편견 없는 사랑’이 기억되기 때문이다. 식민지 학생이라는 차별이 없었던 점이다. 오히려 키가 크다는 나의 특성을 살려 다른 학생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교실의 높은 곳에 못을 박는 일을 시키거나, 선생님 집에 가서 힘을 써야 할 가사 일을 돕는 데에 한 몫을 하였다. 특히 해방이 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나를 두고 서운해 하며 일본 학생들 앞에 나를 내세우고, ‘너는 한국에 가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고 작별인사를 하며 박수를 치게 한 것이다.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는 이렇게 인종과 나라를 구별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어려서부터 잠재되었던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다문화 가정이 커다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본 여자선생님이 나를 대해주던 모습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학교의 선생님이 개방된 마음으로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당시 일본에서 유치원부터 소학교 2학년까지 철저하게 군국주의 교육과정(敎育課程)에 따라 공부했다. 이것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육 자체만은 식민지 학생이건 본토학생이건 구별하지 않고 사랑으로 행해졌음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가족은 관부연락선을, 아마 아버지께서 근무를 하고 계셔서, 겨우 타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모아놓은 재산이 있고, 그것을 압수당해 그대로 놓고 한국으로 갈 수도 없어서 일본에 남아 우리가 부르는 ‘재일동포’가 되었으나, 우리는 ‘귀환동포(歸還同胞)’가 되었다. 자유의사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귀환동포라고 부르지만 일부 지역에서 우환(憂患)동포라고 부르기도 했다.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몸만 빠져 나와 여기저기 걱정거리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귀환동포 가운데 한국에 친인척이 없을 때는 귀환동포 수용소에서 반 거지 생활을 하였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월성군 서면 천포리로 왔다. 친척들이 살고 있어서 당장 의지할 곳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건천초등학교 2학년에 입학하여 한글을 공부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한글을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금방 깨우친 것이다. 그만큼 배우기 쉬운 우리 글자인 것이다. 그럭저럭 학교를 4학년 초까지 다니며 장티푸스에 걸려 학교를 못 가기도 했지만 집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내공을 쌓았던 것 같다. 혼자서 글짓기 연습을 하여 처음으로 상을 타게 된 것이다. 담임선생님의 손을 잡고 대구까지 가서 동시 전시회를 구경하고 왔다. 도약의 첫걸음이었다. 상(賞), 칭찬 받는 것은 힘을 솟구치게 한다. / 정리=박해룡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