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낭만을 위하여
추억과 낭만을 위하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3.2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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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에 포장돼 있는 시간들은 풀어 보지 않는 게 나은 경우도 종종 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 같은 골목 끝 집, 초등학교 동창생, 백열등 켜 둔 막걸리집, 겨울철에 유난히 따스했던 초가집은 기억 저편에 남은 채 당장의 현실 속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는 ‘하나의 잔영’일 뿐임을 잊기 위해 영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이 ‘7080’이란 속어다.

지금의 삶이 지난 시절보다 윤택하고 합리적이며 풍요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자장면이 훨씬 맛있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뭘까?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망각은 ‘지난 것을 모조리 아름답게 색칠하는 마술’을 지니고 있는가 보다.

군복무 시절 지독했던 고참병을 사회에 나가서 만났을 때 미워하는 후임병은 거의 없다.

대학교 정문에 탱크가 버티고 서 있던 지난 70년대, 일 년에 수업하는 날은 3, 4개월에 불과했다.

강의가 끝난 후 몰려간 막걸리집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며 마시던 술에 따라 나오는 안주는 ‘신 김치’가 전부였다.

몇 번씩 다시 청하는 김치 안주를 주인은 별 말 없이 내주곤 했다. 한두 번 쯤 눈을 흘기기도 했겠지만 그런 기억은 전혀 없다.

술값이 모자랄 때 학생증이나 영어사전을 내밀어도 받아주던 아주머니의 선 한 모습만 생각난다.

당시는 음주문화 분위기도 요즘과 달랐다.

잘 갖춰진 카페에서 여자 친구와 둘이서 양주를 마시는 장면은 ‘7080’ 세대에게 거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낯선 사람과 만나도 쉽게 ‘우리’가 되는 여유가 있었고 일맥상통한다는 일체감 하나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인기를 끌었고 여럿이 앉을 수 있는 목로주점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노래는 도무지 따라 배울 수가 없다. 수 없이 섞여 있는 외래어도 그렇고 속도가 너무 빨라 숨이 턱에 차오른다. 흐르는 운율도 없고 젓가락 장단이 나올 간격도 없다. 호흡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낭만이 없다는 얘기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리워지는 것이 고향, 친구, 추억이란다. 어려움을 이겨낸 뒤 돌이켜 보는 삶 속에서는 그런 것들이 더욱 소중하고 아쉬워진다.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것에 대한 향수, 새로운 것이 옛 것을 무시하는데 대한 섭섭함, 삶 속에서 느낀 무상함 등이 뒤엉켜 추억과 낭만을 더듬게 하는 것이다.

7080 세대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주역들이다. 어려움과 풍요를 동시에 체험한 세대고 자신 보다 ‘너’를 존중했던 사람들이다.

보수 수구라고 그들을 비난하지만 그 곳에서 진보가 잉태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들이 지니고 있었던 낭만이다. 웬만한 것은 침묵하며 참고 견뎠던 인내심, 타인의 고통과 괴로움을 함께 할 줄 아는 인간애, 그러면서도 잘난 체하기를 꺼려했던 순수함이 그들의 낭만을 낳았다.

작천정에 벚꽃이 어우러질 무렵 추억을 더듬으며 낭만을 즐기는 그들은 여전히 이 땅의 주인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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