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이야기
국수 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3.2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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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에 대한 우리 첫 기록은 서기1123년 고려 인종 원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개경에 들러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고려도경에 나온다.

그 이름이 생긴 유래에 대해선 ‘바로 뽑아낸 면을 물에 담궜다가 손으로 건진다’ 는 뜻에서 나왔다는 주장과 ‘밀가루 면을 국물에 담궈서 먹는다’는 의미에서 생겼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국수도 다양한 종류가 개발돼 있어 화려한 측면마저 없지 않지만 실상은 서민의 삶과 관련된 명암이 배어있는 음식이다.

쌀이 귀하던 시절 잔칫집에 찾아오는 손님 모두에게 밥상을 차려 낼 형편이 못되면 간단하게 국수 한 그릇에 찬을 곁들여 대접하던 서민 음식으로 이용됐다.

반면에 복을 비는 상징성을 지니기도 했다.

결혼식, 나이 많은 어르신 생신에 국수를 차리는 것과 어린 아이 돌잔치에 국수를 선물하는 관습은 국수같이 길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밀가루 음식인 국수가 주곡인 쌀, 보리보다 하위 개념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밥을 먹지 못하는 경우 대용식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 70년대 초 국가가 정책적으로 분식을 장려한 적이 있었다.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밀가루 음식을 주식대용으로 권장하기 시작하자 이 분위기에 편승해 ‘라면시대’가 열렸다.

분식집이 학교 주변에 성업하기 시작하는 것도 이즈음이었고 그 때까지 값이 비싸 특미로 여겨지던 자장면이 일반화 돼, 서민의 일회용 ‘요기’꺼리로 변한 것도 이 때부터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자 이 지역에 청국조계가 설정됐고 다수의 청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천항에는 부두하역 작업에 종사하는 가난한 중국인들이 있었는데 비하해 ‘쿠리’라고 불렸다.

가난한 이들이 간단히 식사를 해결키 위해 중국 산동지방의 음식을 변형해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1905년 인천 차이나타운 내에 있던 ‘공화춘’이란 중국음식점이 이를 자체적으로 개량해 만든 것이 ‘자장면’의 효시다.

토종 밀가루 음식으로 주종을 이루는 것이 물국수와 칼국수지만 서민생활과 더 깊은 연관성을 가진 것은 아무래도 칼국수다.

잔치국수는 특미로 사용되는 일이 왕왕 있지만 칼국수는 그야말로 가난한 삶의 ‘한 끼 식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국수의 진미는 단순, 소박함에서 나온다. 요란하게 양념을 많이 넣거나 멋을 부리면 맛을 망친다.

토담장 위로 뻗은 호박 넝쿨 속에서 애호박을 하나 따다 썰어 넣는 것, 풋고추로 맛을 조절하는 것 정도면 족하다.

칼국수는 겨울에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모양인데 잘못이다.

여름철 저녁 무렵 온 식구가 둘러 앉아 땀을 흘리며 먹던 서민 먹거리였다.

추억 때문에 가끔 먹는 물국수, 칼국수, 자장면이 옛 맛과 달라 늘 찜찜했었는데 더욱 멀게 느끼게 할 일이 생겼다.

밀가루 값이 비싸지자 쉽게 먹을 수 있던 ‘한 끼 식사’ 값이 덩달아 뛰어 오른 것이다.

올 여름에도 별수 없이 추억을 찾아 국수집에 들르긴 하겠지만 점점 야박해지는 세상이 멀리 느껴진다.

밀밭 위로 날아오르던 노고지리 둥지를 찾아 헤매던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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