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호에 젖다
괄호에 젖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10.06 2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 깊은 자궁 속 어딘가에

아직도 지우지 못한 바람이

한 짝을 잃지 않기 위해

단단히 끈을 조여 매던

괄호가 동종의 유전자임을

나는 알지 못했다

중환자실 문이

털썩 내려앉은 순간

낡은 구두 한 짝만이 홀로 쓰러져 있다

한 때는

함부로 선택 당하기를 거부했던,

굳어 가는 내 몸 속에

젖은 신장을 떼어 넣어 준 사람

그 빳빳한 기억이

뼈대만 남은 굽에 찍혀

선 생리통을 앓고 있다

한 번쯤은

빈약한 변명들로 쌓아 놓은

숨 깊은 성(城)안에서

아내 웃음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괄호 안, 무엇 하나

나는

변명뿐이었다





[시작노트]



아내가 쓰러지고 난 후 중환자실 문 앞에는

낡은 구두 한 짝만이 홀로 남아 나를 응시하고 있다.

바쁜 일을 핑계로

나는 아내의 흉터 한 번 제대로 어루만져 준 적 이 없다.

아내는 그런 나를 가족이라는 괄호 안에 넣고

괄호 한 짝을 잃지 않기 위해

꼭꼭 끈을 동여 매었다.

그 안에서 나는 늘 빈약한 변명만 늘어 놓았다.

회사가 어떠하다느니, 친구가 어떠하다느니……

모든 것이 내 꿈과 나만을 위한 변명뿐이었다.



한 때는 참으로 도도했던 여자.

조그만 환심이라도 사기 위해 밤늦도록 기다리던 기억이

쓴 웃음을 자아낸다.

복부를 가로지른 수술자국에서 바람소리가 난다.

내 복부 안에는

아내의 젖은 신장 한 쪽이 깊은 숨을 쉬고 있다.



아내가 비워 놓은 자리는 너무나 컸다.

애들 학원비며 아파트관리비며 심지어 노모 생활비 송금계좌까지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기다려 줄줄 알았다.

한 번쯤은 떳떳한 남편으로서

아내의 행복한 웃음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남들 다 한다는, 그토록 원하던 외국여행 한 번

손 꼭 잡고 해볼 줄 알았다.



아랫배를 파고드는 선 생리통이

밤새 파도를 타고 있다.

울지도 못하는 비라도

흠뻑 내렸으면 좋겠다.

/ 이용일 두레문학 회장

[이용일 프로필]



경기 이천 출생

월간 문학세계 신인상 수상 등단

두레문학 회장/동인

함시 동인. 시평회원

공저<두레문학>. <시평>외

블로그 http://blog.naver.com/yilee_62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