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의 시작과 끝, 처용문화제 테마로 손색없어
설화의 시작과 끝, 처용문화제 테마로 손색없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9.2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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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개운포~망해사 길
▲ 외황강이 개운포로 빠져드는 경계. 오른쪽이 성터이고 그 위쪽이 석유화학공단이다. 왼쪽은 넓은 습지를 매몰시켜 신산업단지를 만들고 있다.
천년전 아라비아 상인이 들락거렸던 개운포에 이제 아라비아 기름배가 오간다. 개운포는 울산에서 가장 깊고 다양한 사연이 있다. 이곳에서 발굴되는 신석기 문화재는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의 표본이다. 천년전 이곳에서 발상한 처용설화는 한국문학의 백미다. 개운포는 고대에서 현대까지 문화와 산업 에너지가 응축된 곳이다.

처용설화는 개운포에서 시작되고 종착점은 망해사다. 개운포에서 망해사까지는 외황강과 그 줄기인 청량천이 연결돼 있다. 하천을 따라 걸으면 여정은 15km. 길은 멀지만 사연을 쫓으며 걷다보면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이 길은 처용문화제의 테마로 선정될 가치가 있다. 길 중간중간에 볼거리, 먹을거리, 이벤트를 곁들이는 구상도 필요하다.

출발점인 개운포에 서면 발걸음을 쉬 떼지 못한다. 현재 진행중인 문화재 발굴조사가 눈길을 끈다.

개운포 세죽마을 옛 터에는 한국문물연구원이 땅속 3m에서 조각칼로 뭔가를 열심히 파고 있었다. 덧띠무늬 토기와 고래뼈 들이 연이어 발굴되고 있었다. 덧띠무늬토기는 7~8천년을 올라가는 신석기 초기 문화다. 이곳에는 아득히 먼 시절부터 석기인이 삶을 영위했다. 지금 발굴조사하는 곳에서 200m쯤 아래서는 3주전 작살촉이 박힌 고래뼈가 발견돼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 배를 타고 작살을 찍어 고래를 잡았다는 증거다.

한 마리의 고래는 많은 식구에게 오랫동안 먹을 거리 걱정을 덜어주고, 그런 여유가 문화적 상상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보다 앞서 2001년에는 이 인근에서 무려 2만점의 신석기 유물을 찾았다. 지금도 동북아 신석기를 논의할 때 빠질수 없는 유적으로 다뤄진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일까, 서기 880년쯤에는 신라 헌강왕이 이곳을 찾는다. 기울어가는 신라왕조때 단순히 경치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곳은 군사요충이거나 중요한 산업현장이었을 것이다.

개운포는 오늘날에도 각종 산업이 집약돼 있다. 석유화학 업체가 외황강 양안에서 산업의 혈액을 제조하고 있다. 처용암은 외롭게 강 가운데 놓여있고 공장이 가동하는 분주함이 압도한다. 또 조만간 이곳에는 첨단산업을 유치할 신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처용암에서 20분 정도 강 상류로 올라가면 개운포영성이 나타난다. 개운포영성은 조선시대 해군사령부다. 군선을 만들고 조련하던 이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8영(詠) 가운데 전함홍기(戰艦弘旗)가 있다. 개운포에서 붉은 깃발을 단 군함들이 사열하는 모습이 장관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지금은 위용을 자랑했던 성채는 무너지고 먼 경관을 바라보던 누대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처용암에서 성터까지는 2km 남짓 거리다. 20년전 성터 앞에 불경스럽게 산업폐기물을 매립하기도 했다. 그 매립장과 외황강이 닿는 곳에는 갈대가 무성히 자라 새로운 습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습지를 지나 성터에서 잠시 쉬었다가 외황강을 가로 지른 처용교를 건넜다. 성터 외곽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가면 길은 짧으나 석유화학공단 울타리에 막힌다. 그래서 처용교를 건너 한참 조성중인 신산업단지로 들어서야 했다. 외황강 남쪽 강변길인데 예전에는 길이 있었지만 지금은 갈대가 너무 무성했다. 갈대숲을 헤치고 지나가니 발길에 무수한 게들이 어지럽게 도망쳤다. 갈대밭에 구멍을 파고 사는 이 게들은 ‘갈게’라 부르곤 했다. 등딱지가 진흙색이거나 약한 황토빛을 띤다.

20만평은 족히 될 이 갈대숲은 외황강 하구의 최고 풍치였지만 지금은 절반 가까이 공사장에 편입됐다. 이 갈대숲은 한때는 소금을 굽는 연료로 쓰였다. 이곳은 1910년까지만 해도 소금을 생산하는 ‘마채염전’의 일부였다.

외황강은 개운포성의 외곽 방어용 수로였다. 성곽 옆 깊은 구덩이를 해자(垓字) 또는 황(隍)이라 했는데 이곳은 천연의 물고랑이 형성돼 ‘바깥의 황’이란 뜻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황의 건너편 마을인 오대·오천 마을은 철거되고 문화재 지표조사가 한창이었다. 한때 모기마을이라 불릴 정도로 해충이 들끓은 곳이지만 이젠 모두 공장터로 바뀌고 있었다.

출발지에서 1시간 30분쯤 걸었다. 이제 길은 화창들판으로 이어졌다. 화창들은 덕하 마을의 양쪽에서 흘러드는 청량천과 두왕천 사이에 만들어진 큰 삼각주다. 비옥한 이 땅에는 익어가는 벼가 황금빛을 쏘았다. 잠깐 쉬었다가 청량천 쪽으로 길을 잡았다. 망해사가 있는 문수산은 이제 훨씬 가깝게 다가왔다. 국도에 걸친 다리 밑을 지나면 구획정리사업지구가 나온다. 20년쯤 지지부진하게 공사하는 이 사업지구는 아름다운 하천을 끼고 있지만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 일행 한 사람이 건너편 유림 아파트를 가리키며 저기에 작가 권비영씨가 산다고 말했다. 권씨는 최근 소설 ‘덕혜옹주’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런 문재가 나왔으니 처용가를 빚어낸 이곳의 문화풍토를 빛낸 것으로 자랑할만 하다.

덕하는 동해남부선 덕하역이 있고, 한때 어염이 풍성할때는 남창과 울산역 못잖은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이제는 석유화학공단과 초대형 변전소에 압박을 받아 주거지로서의 입지가 줄었다.

덕하 철도 건널목을 넘어 청량천이 좁게 흐르는 길을 따라 걸음은 이어졌다. 이곳부터는 길이 단조롭다. 그저 한적한 농촌 풍경이 이어진다. 군데군데 오리며 닭을 파는 영업집이 있어 배가 출출하면 동동주 한잔을 곁들인 음식을 먹고 걸음을 옮길 수 있다.

농촌기술센터를 지나면 오리고기 집단영업장 앞에서 구치소와 두현저수지 양갈래 길이 나온다. 두현저수지쪽을 택해 울산~부산간 국도 지하도로를 넘으면 이제부터 망해사로 올라가는 산길이다. 산길은 가파르지 않고 길지도 않다. 20여분 걸으면 목적지 망해사에 닿는다.

망해사 창건은 처용설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헌강왕이 개운포를 방문했을 때 갑작스런 구름을 몰고온 동해용을 달래기 위해 지었다는 연기설화다. 망해사 뜰에 서면 멸리 개운포가 아스라이 보인다. 겨울 해가 뜰때는 외황강과 청량천으로 이어진 긴 통로를 따라 햇빛이 일찍 닿는다. 망해사에는 오래된 부도탑 두 개가 고찰임을 증명한다.

이 절에는 큰 후박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후박은 개운포의 목도섬에 자생하고, 세죽마을에만 자란다. 후박나무 한 그루도 망해사와 개운포의 인연을 떠올리게 한다.

/ 김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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