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민주화의 거친 물결(1)
《제8화》 민주화의 거친 물결(1)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9.19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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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제도는 인류가 창안해낸 가장 이상적인 제도이지만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제도이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완성될 수 없는 제도이다. 여기에 ‘자유’를 접두어로 붙이면 영원한 진행형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변화를 전제로 하고, 항상 이상(理想)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민주주의를 쫓는 우리 학생들이 ‘학도호국단’과는 별도의 조직으로 학생자치기구로서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를 결성하고, ‘총학생회’를 1985년에 출범시켰다. 그 과정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가는 ‘자유’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투표라는 인류만의 의사표시 행동을 통계적으로 합산하는 자유에는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겪어가며 ‘자유’ 속에서 총학생회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김진석’이 선출되었다. 여기서 김진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표면에 나서지 않는 학생이었다. ‘울산대학교 30년사’에는 그가 좀처럼 어떤 직책을 맡아 일련의 투쟁에 앞에 나오지는 않으나 여러 형식으로 표출되는 대부분의 집회에 그가 나타나 조용하게 협의를 받는 대상이었음이 여러 교수들로부터 관찰되었다. 그는 내가 총장으로 부임한 1988년에 총학생회 부회장 직책을 맡은 바 있다.

1988년 3월 16일부터 학생들, 철들을 때가 되었을 20대의 청년 대학생들과 상호작용을 아주 거창하고 힘들게 했다. 학문적 용어로 ‘상호작용(相互作用)’은 어느 한 쪽이 먼저 영향을 미치면 그 영향을 받은 다른 한 쪽이 그 영향을 받아 변화된 모습으로 또 하나의 다른 영향을 되돌려주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모습은 바둑판에 잘 나타난다. 총장은 항상 백을 쥐고, 학생은 흑을 들어 먼저 영향을 불러일으켰다. 교육원리로 보면 총장이 흑을 두어야 할 일이었다. 하여간 대학의 총장이 민주화 열풍을 뜨겁게 받아 그 영향을 다시 대학생들에게 어떻게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은 총장의 교육철학,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주 오래 전(1965), 서울대학교의 유기천 총장은 호신용 권총을 집무실에 놓아두었다가 총장실에 난입한 ‘운동권 학생들(?)’의 눈에 띠어 ‘쌍권총 총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때부터 운동권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 같다. 1980년대 중반, 대구의 유명 대학 총장이 집무실에 메모 수첩을 놓아두었다가 총장실에 난입한 운동권 학생들에게 발견되어 ‘총장실 점거의 유행’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 메모 수첩에는 업무의 중요한 일정과 함께 비자금(?) 내역이 적혀 있었다. 세상사에 뒷거래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철칙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이 되겠지만 울산대학교 총장실에는 비자금이 없었다. 분명히 밝히건대, 나는 ‘교육적 인내심’으로 대학생들을 포용했지 비정상적 회유와 설득으로 미봉책을 쓰지 않았다. 그 포용의 결과가 2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타난다. 뒤에 좀 더 자세히 풀어갈 것이다. 물론 여기 ‘교육적 인내심’에는 운동권 교수도 포함된다.

그 때의 대학은 학문을 탐구하는 조용한 상아탑이 아니라 정치적 소용돌이의 선봉대를 자처하는 운동권 학생들의 ‘정치적 운동장’이었다. ‘운동권 학생들’이라는 용어 자체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 했다. 1960∼70년대에 외국에서 살다가 돌아온 학자들 중에 ‘운동권 학생들’이라고 하면 언뜻 운동선수를 떠올려 ‘이총장이 진짜 운동권 학생 출신이잖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몇 안 되는 키 큰 농구 선수였기 때문이다. /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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