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3월 16일부터 학생들, 철들을 때가 되었을 20대의 청년 대학생들과 상호작용을 아주 거창하고 힘들게 했다. 학문적 용어로 ‘상호작용(相互作用)’은 어느 한 쪽이 먼저 영향을 미치면 그 영향을 받은 다른 한 쪽이 그 영향을 받아 변화된 모습으로 또 하나의 다른 영향을 되돌려주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모습은 바둑판에 잘 나타난다. 총장은 항상 백을 쥐고, 학생은 흑을 들어 먼저 영향을 불러일으켰다. 교육원리로 보면 총장이 흑을 두어야 할 일이었다. 하여간 대학의 총장이 민주화 열풍을 뜨겁게 받아 그 영향을 다시 대학생들에게 어떻게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은 총장의 교육철학,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주 오래 전(1965), 서울대학교의 유기천 총장은 호신용 권총을 집무실에 놓아두었다가 총장실에 난입한 ‘운동권 학생들(?)’의 눈에 띠어 ‘쌍권총 총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때부터 운동권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 같다. 1980년대 중반, 대구의 유명 대학 총장이 집무실에 메모 수첩을 놓아두었다가 총장실에 난입한 운동권 학생들에게 발견되어 ‘총장실 점거의 유행’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 메모 수첩에는 업무의 중요한 일정과 함께 비자금(?) 내역이 적혀 있었다. 세상사에 뒷거래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철칙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이 되겠지만 울산대학교 총장실에는 비자금이 없었다. 분명히 밝히건대, 나는 ‘교육적 인내심’으로 대학생들을 포용했지 비정상적 회유와 설득으로 미봉책을 쓰지 않았다. 그 포용의 결과가 2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타난다. 뒤에 좀 더 자세히 풀어갈 것이다. 물론 여기 ‘교육적 인내심’에는 운동권 교수도 포함된다.
그 때의 대학은 학문을 탐구하는 조용한 상아탑이 아니라 정치적 소용돌이의 선봉대를 자처하는 운동권 학생들의 ‘정치적 운동장’이었다. ‘운동권 학생들’이라는 용어 자체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 했다. 1960∼70년대에 외국에서 살다가 돌아온 학자들 중에 ‘운동권 학생들’이라고 하면 언뜻 운동선수를 떠올려 ‘이총장이 진짜 운동권 학생 출신이잖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몇 안 되는 키 큰 농구 선수였기 때문이다. / 정리=박해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