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나는 꼴은 못본다?
개천에서 용나는 꼴은 못본다?
  • 김명석 기자
  • 승인 2010.09.08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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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 고시촌이 부글부글 끌어오르고 있다. 유명환 장관의 딸 외교부 특채논란으로 불거진 고시생들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신림동 거리 곳곳에는 이를 비난하는 플랜카드가 내걸렸고, ‘현대판 음서제 폐지를 위한 사시·행시·외시 연합 카페’에는 하루 만에 100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 정부의 고시 폐지 또는 축소 움직임에 반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힘없고 빽(?)없는 서민들의 가장 빠르고 확실한 신분상승의 척도가 된 고시제도, 그 기원은 고려 광종 때 처음으로 실시되었던 과거제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험을 통해 실력 있는 관리를 채용하자는 취지였지만 그러나 도입 당시의 주된 목적은 왕권 강화에 있었다. 과거제도 이전에는 관리를 뽑던 세습제나 추천제는, 유능한 관리를 확보하기 어렵게 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특정 가문으로부터 관리가 계속 배출되어 관리배출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왕의 권위를 넘보게 되는 강력한 귀족 세력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 시행된 과거제도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백성들에게 능력위주로 관리를 선발하는 공정한 제도라는 믿음을 주게 되었고, 과거 합격자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능력 중시의 가치관은 과거제도 실시로 인해 생겨난 것이면서 동시에 과거제도가 천년 가까이 지속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과거제의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 이르러 행정고시, 외무고시, 사법시험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가 열려있던 고시제도는 최근에 이르러 혼자서 머리 싸매고 공부만 한다고 해서는 안된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법조인을 선발하는 사법시험의 경우 2017년에 이르면 폐지되고 로스쿨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 로스쿨 제도 도입 배경은 수준 높은 법률가를 대거 배출하여 국민들에게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특성화·전문화 시대에 맞는 다양한 지식배경을 가진 전문법조인을 양성하여 국가 경쟁력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경쟁력과 서비스 향상이라는 긍정적인 취지에도 불구하고 로스쿨은 높은 교육비로 인해 ‘부의 대물림’을 고착화시킨다는 우려를 안고 있다. 어이없게도 현행 3년제인 로스쿨을 졸업하는데 드는 학비만 최소 1억원 이상이 든다고 한다. 만약 법조인 선발의 유일한 통로를 로스쿨로 대체한다면 당장 1억원의 학비가 없는 사람은 법조인의 꿈을 접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줘야 한다는 헌법 정신과도 배치된다.

또, 매년 2천명의 신입생을 뽑는 로스쿨을 나온다고 해서 모두가 법조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확정된 바는 없지만 로스쿨 졸업 정원의 70%정도만 법조인으로 선발한다는 말도 들린다. 이는 기존 기득권층에서 변호사 숫자가 늘어나는 것에 대한 반발 요인도 한몫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해마다 배출되는 로스쿨 인원의 30%는 어떡할 것인가. 들리는 말에 의하면 로스쿨에 입학한 학생들의 상당수가 그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우리 사회 지도계층의 자제들이라고 한다. 당장 내년부터 쏟아져 나올 탈락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행정고시 특채 채용제도를 만든 것 아니냐는 의혹은, 이번 유명환 장관의 딸 특혜시비로 더 확산되는 모양새다.

이러한 특채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공무원 채용제도 선진화 방안’이란 이름으로 올해 전격적으로 발표됐다. 당정협의도 거치지 않고 여론 수렴과정도 없이 내년부터 시행되는 이 제도는 2011년 30%의 5급 공무원을 특채로 선발하고 2015년까지 전체 인력의 50%까지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글로벌 핵심인재를 찾는다는 취지로 생겨난 이 제도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객관성과 공정성 시비에 휘말렸다. 예견된 일이었다. 행정고시는 우리 나라 관료제의 근간을 이뤄왔다. 필기시험으로 이뤄지는 행정고시는 최소한 학벌이나 집안의 배경이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비교적 공정한 선발 방식이었지만, 이를 축소하고 외부에서 충원하겠다는 특채 제도를, 여론 수렴과정 한번 없이 서둘러 발표한 것은 로스쿨 탈락자들에게 대한 배려가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다.

지난 7년간 외교통상부가 특별채용으로 뽑은 사람이 같은 기간 외무고시를 통해 선발한 인원의 4배가 넘었다는 사실만 봐도, 그 취지의 정당성은 차치하고라도 운영을 거꾸로 하고 있는 꼴이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중세시대의 음서제도를 채택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제 개천에서는 용이 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개천에서 용이 나는 꼴은 눈꼴시려서 못봐 주겠다는 것이 이 나라 지도층 인사들의 속마음이 아닐까 두렵다.

/ 김명석 서울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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