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울산대학을 맡아봐(3)
《제3화》울산대학을 맡아봐(3)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9.07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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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회장의 이러한 결정은 당시의 울산공업학원 제 4 대 이사장 정몽준 의원과도 의논된 것이어서 하루라도 빨리 통보를 해드려야 할 일이었다. 바로 문교부 장관실에 면담 신청을 하고 종합청사로 향했다. 당시 김영식 문교부 장관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같이 근무했었다. 한국교육개발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장관으로 임명된 분이고 같은 교육학 전공이어서 평소에도 대화가 있었던 사람이다. 별 문제 없이 그간의 명예회장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모든 절차는 조용하게 밟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강원대학교로 향했다.

평소의 생활철학대로 시작과 끝이 한결 같아야 한다는 태도를 스스로 다짐하여 조용하게 강원대학교에서의 업무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울산대학교에 관한 제반의 업무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우선 울산대학교의 설립배경에서, 1970년 울산공업학원이 명예회장의 주도로 설립되고 당시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비서실장인 이후락씨가 울산발전을 위한 공업단지 건설에 맞는 수준 높은 고급인력의 양성, 새로운 공업교육의 물고를 튼 것으로 알게 되었다. 그만큼 애착을 갖고 학교운영에 깊이 관여했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완전히 물러나 있은 지 오래된 것도 알게 되었다.

초대 총장으로 이 관 박사가 1970년에 취임하여 1988년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학교를 떠날 때까지 18년을 울산대학에 봉직하였다. 창설 당시의 구호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자’이었고 이것은 울산시민들에게 대단한 비전으로 다가왔다. 그 비전의 일부분은 초창기의 울산공과대학이 영국 정부의 기술지원을 받아 상당수의 교수들을 영국에 수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오게 하는 데서 보여주었다. 이런 희망을 담은 구호가 ‘동양의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공대’로 최고의 공과대학이 울산에 생긴다는 것으로 외쳐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지는 법인지 울산대학교의 변화 모습이 울산 시민들에게는 보이지 않아 주민들로부터의 실망, 원성, 외면이 있었고, 학교안의 교수와 학생들로부터도 울산공과대학의 특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불만이 쌓이고 있었음을 감지했다. 이에 대한 최선의 단기처방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관심을 끌어내고, 이에 걸 맞는 대학교의 변화를 보여드리는 것이었다. 바로 울산대학교의 발전 구상에 몰입하였다. 첫 번째가 지역사회의 산업중심 특색을 살리는 공과대학과 자연계열의 획기적인 변화?발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둘째는 울산에 하나 밖에 없는 대학으로서의 책무를 다 하는 방안을 수립하는 것이고, 따라서 셋째가 되는 산학협동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울산공과대학 졸업생이 울산의 공장에 전문엔지니어로 취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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