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무주 그리고 울산
후쿠오카, 무주 그리고 울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8.2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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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동, 닌징, 가이당’

‘방석, 당근, 계단’을 어머니는 낯선 단어로 표현하셨다. 우리말 발음은 꽤 서툴렀지만 ‘자부동, 닌징, 가이당’ 따위에서는 부드러운 뉘앙스가 풍겨져 나왔다. 나는 왜 어머니가 우리말에 서툰지, 왜 학교에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 단어를 거침없이 쓰는지 늘 의문에 싸여 있었으나 애써 그 이유를 묻진 않았다. 이미 우리 집에선, 그 밖에도 수십 개의 낯선 단어들이 이미 정착(?)의 절차를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손님이 오셨을 때 어머니가 ‘자부동 가져 오너라’ 하시면 나는 이내 ‘방석’을 떠올렸고, 밥상에서 ‘닌징을 많이 먹어야 건강해진단다’ 하시면 달큰한 ‘당근’ 조각을 입에 넣고 열심히 아작거렸다. 하굣길, 학교 계단에서 넘어져 무릎이 깨져 돌아오면 ‘항상 가이당 조심해야지?’ 하시며 계단의 위험성을 주지시키곤 하셨다. 적어도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나는 그렇게 특수한 용어들이 일본어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지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어머니는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나셨다. 전라북도 무주(撫州)가 고향인 외조부께서 전 가족을 이끌고 후쿠오카로 이주, 정착해 있었던 터라 어머니는 타국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었다. 일본 전통문화와 풍습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여학교까지 마치는 동안 어머니에게 ‘한국’이라는 개념은 거의 깃들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이후에 터무니 없이 파생된 한국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가급적 한국인이라는 티를 내려고 하지 않으려는 의식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그러나 1945년, 그토록 꿈꾸어 오던 조국해방의 가슴 벅찬 소식이 밀물처럼 밀려들자 외조부는 가족 중 몇몇을 이끌고 귀국길에 오른다. 이때 어머니도 막내 동생과 함께 고국 땅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우리말을 단 한 마디도 못했음은 물론이고 한국의 낯선 풍습 앞에 맞닥뜨렸을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리라.

그때 어머니의 나이 18세. 한창 꽃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손에 이끌려 찾은 고국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긴 하였으나 건국을 향한 과도기적 혼란이 끊이지 않았고, 오로지 땅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민초들의 생활은 그다지 녹록지 않았다. 좌, 우의 체제 갈등 속에 표류하던 조국은 결국 남북 분단이라는 엄청난 아픔까지 떠안고야 말았다.

1950년, 피를 나눈 민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한국전쟁의 비극 앞에서 어머니는, 피란민의 대열에 파묻혀 친척이 정착해 살고 있던 울산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울산과 인연을 맺게 될 운명이었던지 누군가가 중매를 선다.

그러나, 우리말도 서툰 데다 가문의 전통과 생활풍습이 전혀 다른 먼 타지의 사람을 맏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는 집안 어른들의 거센 반발이 일었다. 영,호남의 집안이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그 당시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집안의 끈질긴 반대를 물리치고 혼인은 성사되고 말았다. 고지식한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쓴 아버지의 강한 의지가 관철된 것이다.

‘우리말이 서툰 것은 시간이 흐르면 차츰 나아질 것이고, 경상도 풍습에 익숙치 못한 것은 차근차근 가르쳐 줄 것이다. 같은 피를 나눈 민족끼리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가슴 아픈데 사람에 앞서 지역을 따지는 옹졸한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다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아내로 맞을 것이다.’

수년 전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일기장의 내용이다.

이제 어머니도 어느덧 팔순을 넘기셨다. 몇 해 전에는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후쿠오카를 다녀오셨다. 그곳에서 여학교 시절의 동창을 수소문, 치매전문병원에 입원 중인 옛 단짝을 극적으로 만나셨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고 낯선 고국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던 어머니의 마음속에 일본은 과연 어떤 나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까?

/ 김부조 시인·동서문화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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